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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Doragraphycs/시사

이용 당하는 자들을 위한 변명

 믿음은 사실을 입증할 수 없거나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명제를 근거로 구축된다. 믿음은 의지의 산물이지 주어진 사건, 사실에 대한 기술은 아니기 떄문이다. 1+1=2만큼의 필연성을 가진 사실은 어떠한 의지의 작용을 필요치 않아도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시 누군가가 1+1이 왜 2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논리'라고 부르는 개념의 배후 전제들을 의심하는 것이지, 1+1이 2가 된다는 자명성에 대한 의심은 아니다.

  어쨋거나 우리에게 논리적 사고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논리적 사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믿는다'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믿음은 흡사 필연성이 있다는 듯 이야기 하지만 그 필연성에 도달할 수 있는 논리가 부재하며, 경험을 증거로 내세우지만 개연성을 초월해 있다. 어려운 말이지만 곱씹어보자면 그렇다. 소위 '믿음'의 말들은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고, 삶을 설명하는 듯하지만 그다지 교합점이 없다. 한마디로 하자면 '믿음'은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말이다.

  말이 어려워지는 것은 아마 나도 믿음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거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다.

  헤겔의 말에 따르면 '정신은 현실에 자기 구현을 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절반만 맞았다. 사상은 목표지향적이고 당위적 가치를 갖는다. 사상에 매료된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세계를 보는 사람과 같다. 사상가들은 무엇을 보든간에 그것에 적합한 존재의의를 부여한다. 그것이 사상에 위배되거나 경계 밖의 것이라면 수정하거나 무시 혹은 왜곡하려 한다. 사상은 세계를 바라보는 참다운 시각을 부여하려 하지만 참다운 세계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꾸 세계에 없는 어떤 것을 구현하려고만 할 뿐이다.

  맑스의 말에 따르면 사상의 출생지는 신도 아니요, 논리나 이성도 아니다. 사상은 치열한 밥그릇 싸움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식탁보 역할을 하거나 적당한 말로 사람들을 구워 삶기 위한 구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사상이 보여주는 세계가 픽션일 지라도, 위력은 실재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특수한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믿고' 있다. 예컨데 많은 사람들은 '자율 경쟁'이 정의롭다고 믿는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가 주먹 싸움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도 정의롭다고 믿는 자들인가? 혹자는 능력과 노력을 겸비한다면 그만큼의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광고가 만든 과대망상이다. 모든 사람이 노력하고 재능을 갈고 닦는다고 하여도 모두 다 페라리를 끌며 해외 여행을 가고 일급 레스토랑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교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에서도 장학생과 꼴찌는 엄연히 있기 마련이다. 분배는 노력과 재능의 절대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힘과 위치에 따라 차등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명박은 한국 경제를 살릴 수 있는가? 이명박이 단기적인 건설 부양정책, 레저 관광 산업, 친기업 정책으로 GNP를 끌어올릴 수 있을 지도 모르나,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 성장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경제의 성장만으로 고용문제, 빈부의 격차의 극화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삼척 동자도 아는 사실이나 우리는 여전히 그 불가능한 기대를 품고 있다. 우리는 왜 불가능한 기대를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다시 헤겔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자. 그에 의하면 정신은 자기를 세계에 실현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 지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 동기가 정신이 자기를 완성하려 하기 때문은 아니다. 사상의 근원에는 엄연한 수익자가 있다. 프랑스 혁명(엄밀하게 말하자면 부루주아 혁명)의 수익자는 중상공업자였다. 모스트모더니즘의 최종 수익자는 예술가가 아니라 기업이다. 사상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마취시킨다. 사상은 행동규범을 제시하여 준다. 그것은 사이비 교주의 그것처럼 원시적이지 않다. 사상은 인간의 사고에 침투하여서 교묘하게 생각을 제어하고 흡사 그러한 생각이 자신의 결정인 것처럼 보여진다. 이명박이 경제 대통령이 된 것은 대선광고와 그가 과거에 이룩한 영웅담에 입각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명박이 경제를 말아 먹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가정 경제를 배신했고 강남의 부자들을 살찌우는 데 쓰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안티 한나라당이거나 진보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도 말했듯, 현실에 냉혹하다면 우리도 현실을 냉혹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정치는 사상과 정의의 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의 이익다툼이다. 강남 땅부자들이 한나라당을 옹호하는 건 비난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거다. 요는 세금도 못 낼 형편의 수입을 가진 집에서 조세 감면 정책을 옹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직접 참여하는 건설 회사의 관련자도 아닌데, 강을 파헤쳐 수질을 나쁘게 만들고 국가 복지나 국방에 쏟을 국민의 세금을 엉뚱한 곳에다가 낭비하는 4대 강 유역 운하 건설에 찬성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또는 기업과 정부가 미디어와 매체를 장악하여서 현실 왜곡과 대중 조작을 용이하게 하게끔 내버려둘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자. 우리는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사상은 어딘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최종 수익자를 위해 우리를 열심히 이용해 먹는다. 이들은 최대한 우리를 이용해 먹고 먹고 살만큼만 보수를 준다.(가나에서 카카오를 따는 어린애들을 아는가? 이들은 대개 초콜렛을 먹어본 적 없다. 일년 내내 카카오를 따면서도 말이다.) 나는 우리의 노력과 노동에 비해 보수가 좀 적지 않나 생각해 본다. 허허벌판에 60층도 넘는 빌딩을 세우고 중산층 가정의 일년 수입을 웃도는 가격의 와인을 마시며 부자들은 "너도 노력한다면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23살부터 나는 이런 거짓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부와 권력은 소수에 의한 독과점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끌어내리거나 그들의 이해관계에 기생하지 않는-그러니까 내가 가진 직업이 법인 카드나 판공비가 나오지 않는 직업이라면- 한 내가 한끼에 몇 백만 원하는 레스토랑에 갈 일은 없는 것이다.

 필자는 사회 운동가도 아니고 정의를 구현하고픈 열정에 피 끓는 청년도 아니다. 본인은 그저 예비 실업자이거나 츄리닝 차림의 고시생이 되거나 4년동안 비정규직으로 최소 시급을 감수해가며 일해야 할 운명을 가진 대학생이다. 나 역시 사회와 기업과 사상에 이용 당하는 사람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사상과 현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틈 속에서, 지배와 보상의 적절한 타협점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한민국은 20대 중반에 있는 대학생의 손익 분기점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