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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Doragraphycs/시사

우리는 “자유”를 어떻게 쓰는가?


 

 

0.     들어가면서

 

 이 글의 목적에 대해 일러둘 것이 있다평소에 나는 자유란 것을 문득 떠올리면서 과연 자유가 단지 인간의 어떠한 가치로 해석할 수 하는지아니면 그것을 정치적 용어 혹은 경제적 용어로 서술해야 하는지 판단이 가질 않았다그것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은 이 자유란 단어가 앞서 말한 세 차원을 모두 함의를 한다는 것이겠지만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자유는 사전적으로 정의되는 것 이상이다왜냐하면 자유에 대한 정의적 서술은 일반론적인 의미를 벗어날 수 없으며 현실에 대응함 없이 추상성을 갖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가 삶의 매 순간 경험하는 것은 추상적인 형태의 자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자유다.[각주:1] 이러한 점에서 원시적으로나마 자유를 명명한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도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각주:2] 근대 시대에서 자유란 지극히 사회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본 글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주어진 자료를 검토하여 객관적인 결론을 내리기보다 특정 성향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하여혹은 필자의 생각이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얼마만큼 견고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유사과학’ 혹은 사이비과학적인 논증이라고 불리어도 무방할 것이다또한 제시된 자료에 관한 필자의 저렴한 이해 수준도 많은 난점이 제기될 것을 예상하는 바이 글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이나 참다운 지식을 부여한다기 보다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조금이나마 자극할 수 있다면 소기의 목적은 일단 달성했다 할 수 있겠다. .

 

1.     자유를 둘러싼 싸움들

 

 자유가 사전적으로 정의된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은 이 것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들이다이것은 공공연하게 일어나며,오히려 당연시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유를 논할 때 어떤 것이 자유이며 어떤 것은 자유가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진위를 판가름할 수 있다면자유에 대한 모든 명제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에 의하여 결판날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만약 자유라는 말이 어떠한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라면비트겐슈타인의 게임이론"[각주:3]과 같이 어떠한 상황 내에서 그 용도가 결정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실상 우리가 자유란 어떤 것이라고 이름을 짓기는 불가능하다그리고 그렇게 전제할 경우각자 반대편에 서있는 자들이 서로를 자유에 대해 몰이해하는 상황이 이해가 될 것이다.

 

 통신수단과 통화가 통제될 뿐만 아니라 산업입지까지도 계획될 때계획된 세계에서 어떻게 여행과 이주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가?혹은 종이의 공급과 모든 배포채널이 계획당국에 의해 통제되고 있을 때어떻게 언론의 자유가 보호될 수 있는가?[각주:4]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기 마련입니다….(중략)…거대한 독재 집단인 민간 기업에 인간과 동등한 권리아니 그 이상의 권리가 보장된다면 자유는 한낱 우스개 소리에 불과합니다[각주:5]

 

 이 두 가지의 주장을 비교해보아도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알 수 있다앞에 인용한 하이에크의 글에서자유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이념에 따라 압력에 대한 해방(liberality)’을 자유의 표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반면후자에서 노암 촘스키가 의미하는 자유는 인간다움을 누리는 권리’ 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물론 문맥과 상황에 따라 이러한 구분도 얼마든지 동의어가 될 수도 있다중요한 것은 자유의 독립적인 정의가 아니다결국 자유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정의적 서술에 의존한다기보다 어떤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지지하는가에 달려있다.

 

2.     자유의 최소한도 내에서 합의는 불가능한가?

 

 그러나 정치적 맥락에서 달리 자유를 인용할지라도우리는 자유에 대한 어떤 모호한 생각을 공통으로 갖고 있다혹은 우리는 자유에 대하여 누구나가 인식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왜냐하면 우리는 명백히 자유에 모순되는 것에 대한 부정을 합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예컨대절대왕정에서 일반 민중들에게 자유가 없었음을 동의하기란 쉬워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너무나도 유명한 홉스의 사회계약설[각주:6]
에 의하면 그러한 동의조차 만장일치를 얻기가 어렵다그의 주장에 의하면,시민들 각자는 흡사 자유로운 권리를 갖는 듯 하지만 결국 그것이 절대 왕권에게 양도라는 것으로 귀결된다자유는 자유의 가장 반대될 것 같은 정치 체제 안에서도 존재한다.

 
 그의 저술활동이 영국 왕당파의 프로파간다였다는 점에서 자유란 개념이 왜곡되었다고 할 지라도여전히 자유에 대한 공통적인 합의를 어려워 보인다왜냐하면 각 사상가들마다 자유란 개념이 사회적인 분위기에 맞게 조금씩 각색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리적 차원에서 우리는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 인간의 숭고한 가치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애매성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지 모른다그렇다면 만약 자유라는 것을 논할 때에 어떠한 정치적 맥락에서의 자유를 더욱 명백히 한다면 어떻게 될까좁혀지지 않는 정치적 이해관계처럼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자유는 불합리하거나 상대가 자유의 참 의미를 음해하고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자유라는 것이 여러 차원에서 뒤섞여 있다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예컨대우리는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 있으면 언론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는 자유에 대해 대체적으로 합의하는 사항이다고전적인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언론의 자유를 논하고 있다.

 

 출판의 자유가 정부의 타락이나 전횡을 막아주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라는 사실을 굳이 강조해야 하던 때는 이미 지났다사실 그렇게 믿어도 될 것이다따라서 인민의 이해관계와는 동떨어진 입법가나 행정 책임자가 인민에게 어떤 의견을 강요하고 특정 교리나 주장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각주:7]

 

 그는 자유의 형태를 지극히 원시적이고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다룬다그러므로 그가 이와 같이 말할 때원론적 자유의 의미에서 이의를 제기할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이와 같은 자유의 원칙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다시 노암 촘스키가 현대 언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알아보자.

 

 전반적으로 주류 언론들은 기본적인 전제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예컨대 부자들을 위한 복지국가를 유지한다는 전제입니다이런 기본 틀 안에서만 의견의 차이가 용납되는 것입니다또한 이런 기본 틀 안에서 주된 언론들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따라서 엄격하게 말하면 언론은 잘 짜인 프로파간다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각주:8]

 

 전자의 입지와 후자의 입지에서 자유에 대한 원론적인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그러나 문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언론의 자유는 명시적이며 현실적 알력을 고려하지 않은 1차원적 자유이다그에게 자유는 자유와 자유가 아닌 것이란 대립구도만 있을 뿐이다따라서 그는 권력 기관이나 다중의 압력만 없다면 언론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그것의 존재가치를 실현할 것이라고 보았다그러나 노암 촘스키의 자유는,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극히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언론이 자유롭다는 것이그것이 어떠한 주장이든 자유롭게 게재될 수 있다는 것인지 언론매체 자체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그러나 많은 경우 언론은 자신만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필요한 경우 기업들의 프로파간다를 자처할 때가 많다왜냐하면 언론은 그 자체로 자유로움을 향유하는 기관이면서, 민영 사업으로써 자유로운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동시에 경제정치 부문에 관여하는 권력기구로써의 자율성도 가지고 있다언론매체는 다차원적인 자유를 고의적으로 악용하기도 하고때로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자승자박에 처하기도 한다.

 

3.     결론

 

 여전히 자유는 좋은 것인가그것에 옳바른 답을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가를 따져보아야 한다그런데 자유는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명확한 실체가 없다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에 대한 정의적 서술을 할 수가 없다단지 특정한 조작적 상황에서 자유가 어떠한 역할을 한다는 것만 가늠할 수 있다그렇게 본다면 자유주의라는 말이 얼마나 알 수 없는 의미인지 깨닫게 된다. ‘-주의라는 행동방식을 붙이기 위해서 자유는 구체적 사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목적과 맥락 없이자유는 귀에 붙으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붙으면 코걸이따라서 자유주의란 말 자체는 아무런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언어혼란전술이라는 것은 이러한 애매성에서 기인한다.

 
 사실 자유란 단어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쓰이는 대부분의 용어들이 명료한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보기 힘들다. ‘좌익이나 우익개념도 정확한 이해보다는 오용의 여지가 더 많은 단어다따라서 오늘 현실적인 사안을 다루는 대부분 경우자유의 논쟁은 정치경제적 알력을 나타내는 말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에 대해 하이예크는 비록 본인은 동의하지 않았으나자유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놓은 바가 있다
.[각주:9]


  물론 자유에 대한 논의가 이것에 한정할 수는 없는 것이며 주어진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은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 자유는 무의미(meaningless)하다왜냐면 누구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그러한 합의는 실제 가능하지도 않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가지고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의 논쟁이 아니다그것은 지금 당장 우리가 실천해야 할 어떤 과제가 있음을 뜻한다그러므로 현실적인 싸움을 이념적 논쟁으로 대체하거나 혼동하는 실수는 지양해야 한다이에 대한 간략한 인용으로 끝맺고자 한다.

 

 그러므로 사변이 멈추는 곳즉 현실적인 생활에서 현실적인 실증과학인간의 실천적 활동 및 실천적 발전과정에 대한 기술이 시작된다.의식에 관한 공론이 사라지고 실제적인 지식이 이것을 대신해야 한다.[각주:10]

 

 

  1. 맑스는 철학의 추상화된 개념에 대한 오래된 싸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추상들은 그 자체로서는, 다시 말해서 현실적인 역사로부터 분리되면 아무런 가치도 갖지 않는다.”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1장) [본문으로]
  2. “흔히 말하는 “자유 의지”를 다루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중략)…이 책은 그보다는 시민의 자유 또는 사회적 자유를 중심 주체로 삼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1장 첫 줄) 물론 그의 저작에서 다루는 자유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겨우 시민 윤리 수준에서 합의될 수 있는 자유라고 할 지라도, 그의 정의는 현재까지 유효하다 [본문으로]
  3.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사용이론 [본문으로]
  4. 프리스리히 A. 하이예크, “노예의 길” 제 6장 법의 지배와 인권 [본문으로]
  5.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제 1권, part 1, 민주주의는 어떻게 몰락하였는가? [본문으로]
  6. 그는 서로 다투던 자연상태 속의 인민이 그들 개인이 가지던 개인의 권리를 양도하여 주권을 창조했다고 보았다. 국가에 의해 개인의 권리는 억류되었고, 그의 방어와 좀 더 기능적인 사회를 위해 그의 권리가 돌아왔으므로 사회계약은 실용주의적 자기-이익 추구의 바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홉스는 국가의 이름을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국가가 사회계약에 의해 창조된 인공적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본문으로]
  7.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2장 첫 줄 [본문으로]
  8. “촘스키, 세상을 말하다” part1 p.72 [본문으로]
  9. 하이예크, “노예의 길” 2장에서, “물론 이런 의미에서의 자유는 단지 권력(power) 혹은 부(wealth)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본문으로]
  10.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1” 1장 1. 서설 에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