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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5.05.05 남녀 평등이 헷갈리는 이유
  2. 2015.05.05 자기계발서에 대한 GQ의 뒤늦은 험담에 대한 험담
  3. 2015.05.05 박정희에 대한 평가의 한계와 그 선결문제들
  4. 2015.05.05 보그병신체는 진짜 병신 같을까?
  5. 2015.05.05 철도노조는 우리편인가?
  6. 2015.05.05 안녕들하십니까에 대한 단상
  7. 2014.11.28 아동기의 신화는 해체되어야 하는가?
  8. 2013.10.07 진영논리자는 환원주의자인가
  9. 2013.10.01 박근혜 대통령의 스탠스
  10. 2013.09.23 안녕, 잠자리. 안녕
문화칼럼2015. 5. 5. 13:51

남녀 평등이 헷갈리는 이유




1. 더치페이를 외치는 남자는 많으나 정작 실행하기는 어렵다. 또한 얻어먹기만 여자를 욕하는 여자 역시 많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남자에게 바랄 때가 있다. 위선적인가? 더치페이가 남녀 모두에게 떳떳하려면 남녀 모두가 경제 활동에 있어 동등할 때 뿐이다. 그러나 생산 전반을 남자가 담당하던 시절부터 지속된 의식이 하루 아침에 변할 리가 없다. 


2. 경제력은 권리 획득에 상당히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경제력이 향상한 계층의 주도 아래 권리의 재분재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성의 사회 진출은 가부장제 청산과 여권 신장에 물질적 토대가 된다. 여성 사회적인 진출이 잦은 현대에 이르러 남녀평등 주장이 강하게 요구되고는 있으나, 여자가 사회적인 성공과 그 유지를 남자만큼 수월하기는 여전히 어렵고, 결국 '좋은 남자=경제력이 있는 남자'라는 전근대적 기준이 역시 유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혼테크'는 결국 여자를 남자의 소유로 속박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3. 남녀평등의 핵심 중 하나는 가부장제의 청산이다. 가부장제를 유지한 남녀평등의 개념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부장제의 그늘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안다면 그렇게 쉽게 외치지 못한다. 남녀가 평등하다고 외치기는 쉽다. 그리고 마치 타자를 이해하는 관용적인 지식인인양 굴어도 당신이나 나나 시대의 인물인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찌질이'로 찍히기 싫으면 거부할 수 없는 가부장제의 찌꺼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가부장제는 청산의 대상이기 앞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4. 남녀평등이 남녀의 갈등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특정 아젠다에서 남녀 간의 대립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가부장제와 남녀평등의 혼재와 혼란에서 비롯된다. 남녀평등이라는 것이 남자에 못지 않게 여자가 스스로의 주인됨을 선언하는 것이라면, 여러 면에서 여자들은 남자 못지 않은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 이것은 가부장제 하에서 얻었던 피지배자로서의 혜택을 포기하고 가장으로서 책임과 권리를 남자로부터 승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의 남자들을 보면 알수 있듯이 '지배'하는 삶, 다시 말해 대한민국 가장의 삶은 보기보단 피곤하고 재미없으며, 부담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요즘같이 먹고 살기 팍팍한 시대엔 더 그렇다.) 그래서인지 근래에서는 남자들 중에서 오히려 남녀평등을 외치는 비율이 많아지고 과거에 비해 어떤 여자들은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양상으로 후퇴한 듯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회가 아직 여성차별적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가부장제 하에 피지배로서의 혜택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피지배자로서의 얻는 경제적 안온함은 여성이 겪는 차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구실이자 차별의 조건이다.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생각(남자가 경제활동을 일임해야 한다거나, 남자가 사회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 남녀가 함께 있을 때는 남자가 여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남녀 평등을 외치는 것은 이중적이다. 차라리 손녀에게 공공연히 남녀차별을 강요하셨던 우리네 할머니들은 비록 가부장제를 인정하고 스스로 피지배적 삶을 살았지만, 남녀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관점이 일관적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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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2015. 5. 5. 13:49

자기계발서에 대한 GQ의 뒤늦은 험담에 대한 험담




 GQ를 오랜만에 봤다. 한때 내가 사랑했고, 여전히 남성지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리라 생각한 잡지였다. 새해를 맞아 몇 가지 기고문이 네이버에 올랐다. 제목은 <새해 첫날 서점에서 자기계발서를 들추고 있는 사람들에게>이다. 날짜를 살펴보니 2014년 1월에 게재한 글이다. 내용인즉슨 자기계발서는 빤한 내용에 당장 당신의 처지에도 맞지 않으니 때리치라는 것이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한 5년 전에 이 글이 실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경제 환란기를 틈타 자기계발서가 유행을 탄지 어언 5년도 더 되었다. 자기계발서의 원조격인 <7가지 습관>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선지 오래다. <마시멜로 이야기>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등등 역시 권장 연령대가 한참은 내려간 책이 되었다. <6주만에 몸짱되기> 같은 제목마냥 '이렇게만 살면 대박이 날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을 하는 책은 많았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녹록한가 말이다. 6주만에 몸짱이 되는가 안되는가는 시간이 지나면 금방 뽀록이 난다. 물론 여기에는 독서자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냐는 물음이 남지만, 자기계발서의 조언들이 실천적이지 않다는 불평은 유효하다. 공수표를 남발해대던 자기계발서의 붐이 사그러드는 것은 자명했다. 종교가 아니고서야 그 밑천 없는 장사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겠나. 다만 억울한 것은 때맞춰 한몫 챙긴 자기계발서의 저자와 출판사가 아니라, '행복하려면 미래를 생각하지 마라' 혹은 '행복하려면 미래를 계획하라' 따위와 같이 양립할 수 없는 제목의 책마저 한 책장에 진열해 둔 독자들이다.


 지큐의 새침한 태도를 가늠해보면 예전부터 자기계발서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에 자기 계발서에 관련한 기사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런 내용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문화 현상 중에서는 오로지 현시점에서만 유의미한 것이 있고, 이것에 대한 비판 역시 그것이 진행 중일 때에서 써야만 힘을 얻는다. 특히 역사적 갈무리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변덕스럽고 호들갑스러운 유행 풍조에 대한 비판글은 비판 대상의 성질에 맞추어 핫하고 즉석적으로 발행되어야 한다. 지큐의 태도는 마치 이명박 정부가 물러나자 터진 봇물처럼 사대강 비판 기사쓰는 언론을 보는 듯하다. 주춤거리는 상대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주류 잡지의 파워라는 것일까. 아니면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안전제일주의의 구호일까.


 앞으로 우리 시대에 자기계발서가 또 다시 유행할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단기적인 관점에서 유행은 순환적인 속성을 보인다. 역사의 반성이란 근엄한 자들에게나 존재한다는 듯, 그들을 꼰대 취급(요새 말로 '선비' 취급)하는 반대편의 꼰대들은 익숙한 것을 새로운 것인양 선언한다. 만약 그때가 되면 지금 책장에 꽂힌 자기계발서를 재활용하는 경우도 생길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미니스커트에 유행이 제3의 전성기를 맞든, 제5의 전성기를 맞든 70년대에 부모 세대가 입었던 미니스커트를 다시 꺼내입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행하는 것은 캐치프래이즈이지, 물건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자기계발서가 다시 유행을 탄다면, (혹은 이와 유사하게 유행이 지나면 비로소 한심하게 느껴지는 소비유행이 되돌아왔을 때) 지큐는 어떤 기사를 낼 것인가? 여전히 독자들더러 '그때 너는 멍청하게 행동했어.'라고 말을 할텐가?


 지큐는 신년부터 왜 내가 과거에 멋모르고 샀던 자기계발서를 상기시키는가. 그들은 왜 뒤에서 혹은 뒤늦게서야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내는가. 왜 이리도 식상한가. 또는 비겁한가.


지큐 - 새해 첫날, 서점에서 자기계발서를 들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102&attrId&contents_id=45428&leafId=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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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GQ, 자기계발서, 지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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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2015. 5. 5. 13:47

박정희에 대한 평가의 한계와 그 선결문제들




박정희의 공과를 중립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은 선결문제의 오류를 갖고 있다.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박정희는 공적과 허물을 중립적으로 다룰만한 위치에 있는 대통령인가? 다시 말해, 다른 정부/정권과 동일한 잣대와 시각으로 다룰 수 있는 정부/정권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과정과 전제의 문제다. 역대 정부를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신중하게 평가하는 시도는 그 역대 정부가 우리 손으로 뽑은 민주주의적인 정부라는 전제에 한해서만 정당하다. 만약 누군가 그 전제를 어겼다면, 평가 역시 다른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박정희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이란 미명으로 성과를 상찬하자는 주장은 넌센스인 것이다. 박정희 정부 자체가 정치적인 집단이 아니다. 박정희 일당은 정치집단이 아니라 원래 군인조직이었으며, 더 정확히 말해서는 국가의 수호자인 군대를 사병화하여 청와대를 점거한 무력조직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절차를 훼손했고, 나아가 의회를 해산해서 민주주의 자체를 말소하려고 했다. 이들은 적어도 민주주의 내에서는 온건한 정치집단으로 간주될 수 없다.


대한민국은 헌법을 통해 민주주의국가임을 스스로 선포한다. 따라서 한국은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박정희를 판단해야 하고,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박정희 정권이 다른 적법한 정권과 엄연히 다른 위상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다른 정권과 그 전제가 다르며, 이 때문에 동일한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 간단하게 말해 박정희 정권은 마치 정당한 권력인양 냉정하게 평가받을 깜냥도 되지 않는다. 저속한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동일한 행위라고 해서 누가 애인의 섹스기술을 강간범의 그것과 같은 차원에서 평가하겠냐는 것이다. 강간범의 강제 삽입은 정상적인 섹스와 동질적인 것으로 전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박정희의 공과를 정치적인 중립에 입각하여 평가하겠다는 것은 강간범의 섹스 테크닉과 애인의 섹스 테크닉을 동일선상에 두고 평가하겠다는 소리와 같다.


(도무지 다른 예가 생각나지 않았어요. 뇌가 타락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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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2015. 5. 5. 13:21

보그병신체는 진짜 병신 같을까?


 




 최근 들어 보그병신체를 진짜 병신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그병신체는 사실 한 명의 허세로 우연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가진 미혼의 여성 구독자들과 신데렐라는 아니지만 쁘디 부르쥬아로서 자기표현욕구가 강한 구독자의 욕망과 상상을 대변하는 수사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보그식 허세와 허위 의식을 공유하는 구독자가 적어도 십수만 명에 육박한다는 것과 이들은 각종 화장품/문화/패션 등 소비 시장에서 수십억 원을 움직이는 돈줄이라는 것이다. 보그는 독자와 자신의 광고주에게 소비유행의 선두에 선 잡지임을 과시하기 위해 허영과 허세, 물신주의적인 정체성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외래어가 이국적인 취향과 고급한 소비생활, 문화/지적 상류사회를 투영하는 아이콘이라면, 이런 외래어를 집대성한 보그병신체는 소비를 통해 손쉬운 신분상승을 꿈꾸는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언어인 것이다.


 한편으로 비록 종합지에 적이 없어서 장담을 못하겠다만, 나는 보그병신체가 정보의 빈약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에디터의 매너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종합잡지라는 것의 주요한 관심사는 패션과 유행, 연예인 가쉽 등등에 머물러 있다. 여성 일반에게 공약된 관심사를 잡지에 싣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것보다는 감각적인 제재로 쓴 글이 많다. 이런 기사의 특징은 핵심이 결코 복잡하지 않으며 표현하고자 하는 심상이 몇 가지 형용사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잡지 한 면에는 생각보다 텍스트가 많이 들어간다. 깨알 같이 글씨만 채운다면 잡지 1장당 A4가 2장은 써야 족하다. 어떻게 하겠는가? 할 말은 적은데 채워야 할 공백은 많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별거 아닌 이야기를 최대한 꾸며 말하거나, 혹은 엇비슷한 형용사를 나열하는 수밖에 없다.


 분석기사나 제품 리뷰도 마찬가지다. 모든 에디터가 모든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며, 마찬가지로 종합지의 기대독자도 모든 제품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잇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마디로 제품을 대하는 에디터와 독자 모두 비전문적이란 말이다. 따라서 기사는 모든 독자의 지적 수준과 관심을 최대한 포괄할 수 있는 수준에서 쓰이는데, 정보의 빈약함을 가리기 위해서 수식어구를 최대한 동원하는 전략을 쓴다. 결국 종합지의 승부처는 내용이 아닌 형용사의 세계가 될 수 밖에 없다. 제한된 재료를 가지고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야 한다면 결론은 MSG를 왕창 쓰는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그병신체는 바로 이러한 딜레마의 돌파구로서 고안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어의 테두리까지 돌파해버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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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2015. 5. 5. 13:17

철도노조는 우리편인가?

좀 맥빠지는 소리지만, 뜨거운 자들은 뜨거운 자대로 미지근한 자는 미지근한 자대로 시태를 관망하는 입장이 있는 법이다. 이번 철도 파업을 바라보는 내 눈은 그렇게 정의감이나 위기감에 불타오르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도덕이나 선악의 판단은 다만 내 스스로에게만 적용시켜야 하는 미적 태도인 것이고, 사회에게는 오로지 사회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켜야할 모호한 공공의 가치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의 문제 이면에는 대립하는 세력들간의 이권 다툼과 외부인들은 알 수 없는 내부사정과 먹고사니즘이 정밀 회로처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공공성 유지를 위해 철도 자회사 분리를 지지하는 나의 입장과 철도 파업자들의 입장은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실상 이들에게 이 문제는 공공선에 대한 결의와 함께 밥그릇 다툼이 결합되어 있다.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이것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그들과 동일한 이슈에 대해 연대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과 진정한 의미에서 '아군'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공에 대한 가치 혹은 '이념', 또는 선의로 움직이는 외부세력과 달리 그들은 실직적 사안을 놓고 반대자들과 갈등을 빚을 뿐이다. 


사태를 걱정하는 우리의 시선은 선할 수 있다. 공공선을 위해 연대하는 우리의 의도 역시 선할 수 있다. 외부자들은 사건에 대해 일정 거리에 놓여있기 때문에 개념적인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당사자는 다르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실재적이다. 철도 자회사 분리 사건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회색빛 갈등이 숨어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그들을 모르는 만큼, 그들의 의중 또한 파악할 능력 또한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코레일 사측보다 코페일 노동자측이 선하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오직 행동 뿐이며, 그들의 행동만이 평가의 유일한 잣대가 된다. 만약 내가 '철도노조'가 아니라 철도노조의 '파업'을 지지한다면 그들의 행동과 그 행동으로 인해 기대되는 결과만이 판단의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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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노조,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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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2015. 5. 5. 13:16

안녕들하십니까에 대한 단상


대자보, 주현우



오늘 아침 타임라인을 수놓은 뉴스에서 단연 화제는 안녕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한 반응들이다. 누군가는 대자보를 찢고 누군가는 안녕하지 못하다는 대자보로 이에 호응했다. 안녕한가 혹은 안녕하지 못한가는 개인의 판단에 맡겨야 할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식으로 대자보를 남기는 일을 대견한 일이라고 칭송할만큼 우리 시대가 표현의 자유에 있어 상당히 위축되었다는 것이다. 서글픈 일이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대자보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기술하기 이전에 분명히 말하고 싶은 바는 이렇다. 나는 철도 노선을 떼어 일부 법인화하는 것이 민영화의 가능성(민영화가 왜 나쁘냐는 반문에는 서울지하철 9호선의 병신성을 예로 들 것이다)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우려, 한편으로 회사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있어 경영진들이 노동 주체를 배제했다는 과정상의 결함, 자칫 생존권과 연결될 수 있는 강압적 조치에 파업으로 맞서는 것이 정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철도 파업을 지지하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모두 정치 및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시민인 바, <안녕하십니까> 대자보는 그 내용과 상관없이 누구나 정치적인 의사표명을 할 수 있다는 징표가 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내가 이러한 안전선을 미리 긋는 이유는 뒤이어 말할 내용이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논지가 <안녕하십니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상되는 오해와 허수아비 치기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다. 하나의 주장에는 옳고 그름이 혼재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제를 두고 긍정적인 국면과 부정적인 국면을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기실 <안녕하십니까>는 주어진 사회 문제에 대한 어떤 대학생의 외침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안녕하시냐'라는 조롱과 역설의 반복적 표현, 그리고 다소 진부하기도 한 자기 반성은 대학생이라는 신분적 발랄함을 만나 청량감을 자아낸다. 이는 표현의 자유가 얼어붙은 시대와의 온도차로 인해 하나의 파격으로 다가왔다. 요컨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자보에 쓰인 수사와 그 타이밍이지, 대자보의 내용 자체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전혀 엄숙하지 않은 관점에서 이것에 동의를 표할 수 있는 것이고, 뒤이어 나온 '안녕하지 못하다'는 화답의 대자보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관망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안녕들하시냐>는 물음은 자기 반성을 넘어 동세대를 문책하는 뉘앙스가 명백히 도사리고 있다. '안녕하시냐'는 물음이 단지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구호를 넘어서, 대중 일반을 향한 책망으로 인식된다면 이것은 더이상 진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안녕하지 못한 사람은 나와 함께 하자'라는 연대를 넘어서 '너희들은 당연히 안녕하지 못해야 한다'는 의미로 확대될 경우 이것은 선악의 문제를 야기하는 또 하나의 배타적 의식이 된다. 내가 '안녕하시냐'는 질문에 다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오늘날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가 안녕하지 못한 상태임을 강요하는 것은 사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생각의 층위를 고려하지 못한 폭력적인 양식이다. 


<안녕하십니까> 대자보의 진의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대자보 원문에서는 자기반성과 군중에 대한 계몽의식이 혼재되어 있다. 문제는 대자보 원작자의 의도가 아니다. 안녕하시냐는 질문은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넘어왔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 물음에 엄숙하게 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안녕하지 못한 상태임을 강박적으로 수용할 필요도 없다. 비록 자신은 안녕할 지라도 이 대자보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정의로운 의식의 고양은 자기 자신에게 되물어야 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관철해야 할 덕목이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엄숙함이 야기하는 피로감을 맛봤다. 때로는 진지한 문제에 진지하지 않게 접근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 또한 알았다. 이번 대자보 이슈가 우리 모두에게 장기적으로 유익하고도 즐거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 '안녕하시냐'는 물음에 그 누구도 정답을 달거나 정답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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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2014. 11. 28. 01:42

아동기의 신화는 해체되어야 하는가?

모님과 이야기하다가 아동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몇 가지 글을 찾아보았다. 확실히 아동을 어른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보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고, 아동을 보호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오롯한 인간으로서 사회활동과 권리를 일시작으로 박탈하거나 제한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아동의 탄생은 아이를 보호할 명분이 되기도 하였지만 아이의 인권을 제한하기도 하는 이중적이면서도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전부 읽으면 좋겠지만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아이의 인권을 신장하자는 측의 주장(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392)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아동은 아동의 결정권을 거머쥔 가족의 영향을 벗어나 사회가 그 발달을 책임져야 한다. 

2. 아동은 최대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받아야 하고, 아동들로 이루어진 조직에서 아동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한다.

3. 학교는 아동의 교육을 독점해서는 안되며, 학교 교육은 아동들에게 계급의식을 재생산하고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4. 아동 인권에 대한 특수한 인식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인권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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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문제는 요즘 청소년인권단체 '아수나로(맞냐..)'와도 연결되는 것 같다. 학교교육에 대한 거부, 청소년의 정치참여와 사적인 생활 보장(외모부터 성관계에 이르기까지), 학칙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와 거부 등등.


분명 근대인이 해온 짓 중 그래도 장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공교육에서도 비판점과 대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나는 여전히 정리가 안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아동을 사회의 품으로 돌리자는 이야기가 중세 이전의 아동관처럼 아이를 마치 책임과 의무에서 어른과 동등한 존재처럼 대하자는 의견이냐고 되묻고 싶다. 예를 들어서 성인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납부하고 노동을 하며,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어른과 동일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둘째, 아이는 불완전한 자아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근대의 생각을 걷어치울 경우, 그렇다면 아동을 명백히 어른과 다른 특수한 심리상태를 갖고 있다는 설명하는 아동심리학과는 어떻게 화해할 것인지를 재차 물어야 한다. 정말 아이는 어른과 똑같은 상태일까?


셋째. 만약 이 이야기가 아이를 중세처럼 작은 어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근대인이 만든 보호의 울타리 아래에서 아동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라면, 앞서 비판했던 공교육의 문제에서 대안적인 운동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컨데 공교육이라는 근대의 산물 아래에서 학생이 교육의 주체가 되고, 학생이 교육행정에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 공교육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소를 가두어 놓고 키우는 방식에서 보다 넓은 지역에 소를 방목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방목한 소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동하고 풀을 뜯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결코 목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교육 내에서 보다 많은 권한을 학생에게 이양하는 것이 자주권 신장에는 도움이 되긴 하지만, 어른의 사회에서 여전히 격리되어 있고 '보호되고' 있는 상태인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학교 속 아동들이 만드는 주체적인 사회는 기성 사회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교육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가상세계(영화 <트루먼쇼> 같은)이자, 일종의 롤플레잉,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넷째, 아이는 어른과 똑같은 책임과 대접을 받는 것이 아이에게 옳을까? 아이가 가진 특수성을 없앤다면 유아 범죄나 학대에 대해 가중처벌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사춘기때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 역시 참작되지 않는다. 아동의 인권이 특수하지 않고 인권의 보편성으로 흡수되어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인권이 무너지는 상황이 올 때(예를 들어 전쟁이라든지, 집단 학살과 같은) 특히 소년 징병이나 유아 학살에 대해서 우리는 비난의 무게를 더할 수가 없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아동기의 신화(그리고 '신화'라는 정치적인 수사를 더해가면서)를 해체할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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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2013. 10. 7. 13:22

진영논리자는 환원주의자인가

조선일보 내부 칼럼인 [기자의 시각] 낙서만도 못한 트윗 한 줄이라는 글을 중심으로.


 공씨가 좋아한다는 위화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고 했다. 빛의 속도로 글이 전파되는 세상에서 그 '목소리'가 사실만을 담기를 바란다면 순박한 것일까. 그렇다면 사실에서 거짓을 골라내는 일은 누구의 몫일까.



작가 위화 팔로워 1430만인 중국 트윗에 어제올린글 "이번소설은 죽은자가 이야기를 하는건데 어떻게 죽은 다음에 이야기를 합니까? 한국기자가 물었다 난 흠 그건 어떻게 그런지 제가 죽은 다음에나대답가능하네요"무려 조선일보 기자라신다

— 공지영 (@congjee) September 29, 2013




 이 기사를 보고 국민 TV의 국장 김용민 씨는 "조선일보가 기자들 뒷담화 장소가 되었다"라고 평했다. 내가 흠모하는 ㅍㅍㅅㅅ의 발행인 이수령님은 이 뉴스를 '병신들의 나와바리 싸움'이라고 일축했다.(추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길, 그는 조선 일보의 기자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닌, 채 총장에 대해 황색 언론질을 일삼는 조선일보가 한편으로 루머의 악질성을 경고하는 칼럼을 내는 이중성을 탓한 것이라고 말했다.)


 탐탁잖다. 한쪽은 수구언론의 대표라고 하는 조선일보의 기자이고, 다른 한쪽은 진보적인 발언을 자주하는 오피니언 리더 중 하나이다. 결국 이 게임은 좌우의 논리로 격돌될 여지가 있었다. 더군다나 공지영 작가는 자신의 트윗에 '무려 조선일보 기자씩이나 된다'면서 꼬집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공작가가 말한 '조선일보 기자'는 사실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일 공산이 크다. '명불허전 조선일보'의 기자니까 이런 되먹지 못한 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여기에 휘말린 기자 역시 조선일보에 소속되어 있고, 자신이 소속한 회사에 적대적인 공 작가에게 우호적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최대한 진영의 논리를 걷어낸 채 트윗에서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분노 컨텐츠가 얼마나 빨리 소비되는가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공 작가에게 정정요구를 관철시켰음에도 끝내 공 작가를 지면 위에 올려 쿠사리를 주는 것은 공 작가의 숱한 리트윗 속에 온갖 소리를 다들었을 기자의 입장에서는 나름 점잖고 입바른 훈계였다.


 공 작가가 그녀가 '조선일보 기자'라는 낙인을 찍어 헛발질을 가중시킨 것을 제외하면, 사실 여기에 진영논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 생긴 명예에 대한 사건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위 진보진영이 갖고 있는 조선일보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효해보인다. 그들의 시각에서 이 사건은 조선일보와 공 작가의 싸움으로 교정된다. 이제 그들은 진영논리와 하등 상관없는 이 일에, 마치 추어탕에 재피가루를 타듯 진영논리를 첨가한다. 그 사람들 식성이야 원래 그렇다고는 알고 있지만. 같은 뉴스를 퍼먹은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랬군요. 트위터에 그런 마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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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2013. 10. 1. 00:35

박근혜 대통령의 스탠스



그렇습니까...



위대하신 아이엠피터님의 블로그 참조

"반값 등록금은 마음만"

http://impeter.tistory.com/1441


 나는 경제는 잘 모른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복지해법이 기술적으로 가당하냐 혹은 부당하냐의 문제로 따지기에 앞서, 더욱이 그것이 옳냐 그르냐로 패를 갈라 싸우기에 앞서,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본다. 따라서 어떤 복지시스템을 구현할 것인가가 선결조건이다. 그러한 시스템을 실제적으로 적용할 때 거론되는 구체적 방안, 예컨데 예산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혹은 어떤 비용을 줄이고 어떤 비용은 늘릴 것인가, 그 시스템을 채택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는 지향점이 주어진 이후에 후결해야 문제라고 본다. 박근혜 정부의 복지는 내가 원하는 복지 시스템에 한참 미달이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의식과 해법이 존재하리라고 본다. 물론 그것이 실제적으로 나에게 어떤 이익을 줄지는 또 따져볼 일이긴 하다.


 박근혜 정부의 복지 시스템에 진보/보수의 프레임을 거론할 필요는 없다. 논쟁의 여지 없이 그의 복지 시스템은 보수적 시각에 맞춰진 것이다. 다만 복지를 철없는 망상가들의 포퓰리즘에서 '오늘의 어젠다'로 끌어들인 것은 복지 문제에 관심을 보인 모든 이들의 덕택이다. 대견할만한 일이다.


 오늘 박 대통령이 노후연금에 대해 번복했다. 그리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국정원 문제를 모르쇠로 일관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상대적인 효과일까. 장사진을 친 촛불 앞에서는 대국민 사과를 하고 정작 중요한 실업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말한 게 아닌데, 국민들이 오해한 거 같다'라고 전 국민들을 난독증 혹은 지적 장애자로 만들었던 MB보다는 성의 있고 능숙한 사후처리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또는 그녀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려고 하는지 분석하는 것은 경제 전문가의 일이고, 일단 그녀는 납득할 만한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칭찬하고 싶다. 


 중간만 해도 잘해보이는 이 놀라운 보색효과. 다시금 무릎을 치게 만드는 MB의 위대함. 한국수령실록을 만들면 드라마 열 편을 뽑아내고도 남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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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2013. 9. 23. 21:23

안녕, 잠자리. 안녕


"허허, 욘석. 놔라, 형의 겁나 쩌는 턱맛을 보여주기 전에." *본문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출처: http://flworld.com/3605



 창문을 열었는데 고추 잠자리가 하나 들어왔다. 그러니까 형광등불에 교란당하는 것은 밤벌레만은 아닌가보다. 기어코 이놈이 형광등으로 돌격하더니 전구와 전구덮개 사이에 갖혀서 나오지를 못하는 거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아니고, 이 놈 하나 구하자고 형광등 덮개를 뜯자니 덮개의 쌓인 먼지며 죽은 하루살이 시체를 마시기는 꺼림칙하다. 이놈은 자기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 뿐이다. 잠자리와 나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구해줄 의무 따위는 없다고 생각도 했다. 몇 번을 악다구니친 후에 포기한 듯 죽음을 기다리는 잠자리를 보다가 하는 수 없이 의자를 가져와 덮개 잠금 장치를 하나하나 제거했다.


 그것도 측은지심인지, 괜한 감정 투사인지는 모르겠다. 이게 살려주면 또 얼마나 살 것이냐. 내가 구해준들 어디서 또 엉뚱한 형광등에 처박고 죽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살려준다고 고마워나 하겠어? 여튼 이것은 귀찮은 일이다. 덮개를 열어보니 지칠대로 지쳐서 '아이 시부럴 죽이든 살리든 니 맘대로 혀'하고 배째라 식으로 엎어진 잠자리 날개를 잡았다. 


 엉뚱하게 죽지 말고 천수를 누리라는 말은 낯간지럽다. 내 눈 앞에서 뭐가 죽는게 꺼림칙해서 그런거야. 호의라기 보다는. 조금 귀찮으면 이 놈은 죽음을 모면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면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했다. 공리주의로 본다면 나는 세계 쾌락 총량에 기여한 것이다. 그놈을 집게 손가락에 끼운채로 다시 덮개를 씌우고 창문을 열어 방생했다. 기절한 건지 담뱃재처럼 바람에 휘날리다가 날개가 깜빡하더니 다시 정상적으로 비행하기 시작한다. 


 너는 적어도 날개에 분가루는 없는 곤충이니 살려준거야. 나방이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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