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리뷰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1989) - 언젠가는 죽을 당신



 당신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굳이 철학적인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끄집어 낼 수 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나, 그러나 쉽지만은 않다. 그것은 "너는 언젠가 죽는다."라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필멸자로서의 죽음을 인식해 왔으나 실제로 살면서 그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은 것은 드물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는 일반적임에도 '나의 아버지가 죽는다' 혹은, '나는 언젠가 죽는다.'라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그 '죽음'이란 내일 찾아올 수 있는 것이고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도 불현듯 찾아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더더욱 그렇다. 분명한 것은 죽음의 가능성은 여전히 당신을 맴돌고 있다. 

  영화로 돌아가보자. 이 말을 들어보았는가? '까르페디엠(Carpe Diem)', 말 그대로 '현실을 즐겨라'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이 말을 '지금과 미래를 위해 이 시간을 소중히 써라' 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근거 없는 확대해석이다. 이런 친구들은 까르페디엠을 미래라는 헛된 영광에 조공으로 바치는 양반들이다. 키팅 선생은 말한다. "여기 사진에 자신만만하고 야망에 찬 눈빛을 가진 친구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죽은 친구들이라는 것이지." 까르페디엠은 한편으로 '메멘토 모리'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죽음을 기억하라." 필자는 다소 펑크족 같은 언변으로 이 메멘토 모리를 정의한다. '어차피 다가오는 미래라는 것은 가짜다. 있는 것은 현재 뿐.' 그렇다. 까르페디엠은 말 그대로 지금 당신이 처한 이 상황,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란 말이라는 것을.

 
죽음이라는 숭고함

  죽음 앞에서 서있는 인간은 숭고하다. 왜냐하면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이지만 불길처럼 정열적인 것이 아니라 대하(大河)와 같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남의 죽음을 목도함으로써 숭고함을 느낀다. 그러나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사리고 있는 것다. 단지 우리는 그러한 결말을 감지 못하고 있을 뿐. 의외의 현실을 이야기해볼까? 당신에게 미래라는 개념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단지 매일 아침 당신이 '살아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생기는 불감증에 불과하다. 어느날 당신이 눈을 감았을 때,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수 있고, 그 날은 아무도 모른다. '당신은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이 문득 피부에 와닿을 때 우리는 한없이 작고 애처로운 존재다. 검고 거대한 무한의 힘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지고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로 다가온다. 죽은 시인의 학회[각주:1]를 보면 알수 있겠지만, 명문대에 나와 명예의 졸업생 사진에 오른 그 누구도 이 시간까지 살아있지 못했다. 잘났건 혹은 잘나지 못했건 흑백 사진 속 그들은 모두 죽은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키팅 선생은 이렇게 말을 한다. '지금 당장 당신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인생에서 중요한 육하원칙

  물론 필자도 미래라는 개념을 '인정'하며 살아간다. 사실 미래를 준비하고 때로 현실을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피할 수 없는 불행이다. 그러나 당신이 희노애락을 느끼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은 오직 '지금 당장'에만 느낄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삶의 진정한 꺠달음은 바로 이 순간 바로 당신의 옆에 있다. 만약 그것이 멀리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어느 순간에도, 혹은 어느 장소에도 당신을 감싸고 있는 어떤 것이며 그러한 진리야 말로 당신을 진정한 삶을 살아아가게할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진리를 폐기해야 할 것이다.

 삶의 진리가 지금 당장 여러분 곁에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정해야할 삶의 지표, 나아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어렵지 않다. 나는 육하원칙에 따라서 이것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가? 바로 '당신이'. 언제? '지금 당장'. 어디서? '바로 여기서', 무엇을?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혹은 할 수 있는 일을)', 어떻게? 잡념 없이 그것을 만끽하고 집중하면, 왜? '오직 그래야만 당신의 삶을 온건히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미래라는 것은 곧 다가올 현실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오지 않는다면 미래란 허구에 불과하다. 당장 당신에게 중요한 것,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실제로 와닿는 현실보다 허구에 가까운 미래나, 이미 멀리 떠나간 과거를 상기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옳은가? 쉽게 얻을 수 있는 오늘의 행복보다 잃을 지도, 얻을 지도 모르는 미래의 행복에 오늘을 "올인"하는 것이 지혜로운가?

 불교의 무문관(無門關)의 제 7칙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사소한 일상에서도 있다. 진리는 우리의 삶 자체를 '삶'답게 만드는 그것이며, 멀리 있는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체계는 언제나 저 먼곳으로, 현실적으로 닿을 수 없는 '그곳'으로 위치시켜 놓는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여기서, 불행해야하며 만족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까르페디엠, 그것은 쉽지만은 않다.

  오늘을 즐겨라. 이말은 왜곡되기도 쉽고 그 뜻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도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미래에 대한 준비까지 현실의 의미를 확장시키란 말은 분명히 아니다. 까르페디엠이란 말은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둔다. 만약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혹은 지금 당장 죽는다면, 미래에 대한 준비는 죽는 순간 당신을 행복하게 살았노라 말할 수 있는가?

  이런 가르침이 쉽다면 좋겠다만, 논리적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에서 이러한 소중함을 놓치고 산다. 왜냐면 우리는 늘 살아가면 우리가 '언젠가 죽을 것(메멘토 모리)'이라는 격언을 놓치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내일 죽을 목숨이라면 다가오지 않을 '미래'보다 지금 내가 행복해야할 시간을 꿈꾸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은 늘 '현재'이다. 분명 까르페디엠은 '오늘을 쾌락을 위해 방탕히 살아라'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당신이 만약 지금 당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이루라는 것이다. 이것은 키팅 선생의 유일한 가르침이기도 했다. 하루를 살아도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1) 삶에서 느껴지는 희노애락 그 모든 것은 '현재'를 매개로 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이며 2)그것에 대처하는 현명한 당신의 선택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기억 속에서 회상할 수 있는 당신도 아니고, 달콤한 미래의 상상 속에 있는 당신도 아닌, 바로 현재 속에 당신이 있다. 살아있음은 바로 당신 자체이며,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현실을 사는 '살아있는 존재'다. 어떤 두꺼운 역사책이나 위인전 속에서도 위대한 인물들의 정열을 고스란히 가둘 수 없듯, 당신의 모든 감정, 야망, 생각은 이 땅을 스쳐가는 무형의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동성은 결코 박제할 수 없는 생명력 그 자체다. 그것이 '까르페디엠', 즉 '시간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1. http://generis.co.kr/script/powerEditor/pages/%EC%A3%BD%EC%9D%80%20%EC%8B%9C%EC%9D%B8%EC%9D%98%20%EC%82%AC%ED%9A%8C%EB%9D%BC%EA%B3%A0%20%EB%B2%88%EC%97%AD%EB%90%98%EB%8A%94%20Society%EB%8A%94%20'%EC%82%AC%ED%9A%8C'%EB%9D%BC%EA%B3%A0%20%EB%A7%90%ED%95%A0%20%EC%88%98%EB%8F%84%20%EC%9E%88%EC%9C%BC%EB%82%98,%20%EC%97%84%EB%B0%80%ED%9E%88%20%EB%A7%90%ED%95%B4%20'%ED%95%99%EA%B3%84'%EB%9D%BC%EA%B3%A0%20%EB%B6%88%EB%A6%AC%EA%B1%B0%EB%82%98%20'%ED%95%99%ED%9A%8C'%20%ED%98%B9%EC%9D%80%20'%EC%97%B0%EA%B5%AC%EB%B0%98'%EC%9D%B4%EB%9D%BC%EA%B3%A0%20%EB%B2%88%EC%97%AD%EB%90%98%EC%96%B4%EC%95%BC%20%ED%95%A0%20%EA%B2%83%EC%9D%B4%EB%8B%A4.%20%EC%99%9C%EB%83%90%ED%95%98%EB%A9%B4%20%EC%98%81%ED%99%94%EB%A5%BC%20%EB%B3%B4%EB%A9%B4%20%EC%95%8C%20%EC%88%98%20%EC%9E%88%EB%8A%94,%20%EA%B7%B8%EB%93%A4%EC%9D%80%20%EC%9D%B4%EC%A0%84%EC%97%90%20%EC%9E%88%EC%97%88%EB%8D%98%20%EC%96%B4%EB%96%A4%20%EA%B5%90%EB%82%B4%20%EC%8D%A8%ED%81%B4%EC%9D%98%20%EC%9D%B4%EB%A6%84%EC%9D%84%20%EC%9D%B8%EC%9A%A9%ED%95%9C%20%EA%B2%83%EC%9D%B4%EA%B8%B0%20%EB%95%8C%EB%AC%B8%EC%9D%B4%EB%8B%A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