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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마루 밑 아리에티 리뷰 -돈과 시간의 남아도는 '잉여'들에게만 권하고픈


영화관에 들어가며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 세계를 좋아하는-솔직해지자면, 지브리의 나머지 사람들을 볼 거 없어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 "마루 밑 아리에티"를 꼭 영화관에서 보고 싶을 것이다. 더구나 지난 번 영화 "벼랑 위의 포뇨"를 미야자키 하야오가 100% 자신의 수작업으로 완성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벼랑 위의 포뇨를 직접 그렸건 안 그렸건 간에 전작이 보여준 아날로그적 감성과 아름다운 영상미는 요즘의 3D 영화와는 사뭇 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전작 벼랑 위의 포뇨는 동심을 잘 살리면서 전개가 우왁스럽거나 유치하지 않다는 점에서 어른도 충분히 즐길만한 작품이었다.

 반면 '마루 밑 아리에티'는 반지하 원룸에 사는 경제 형편인데도 꼭 영화 한 편을 보고 싶을 때나, 혹은 같은 값이면 차라리 '레지던트 이블4'를 보고 싶은 친구를 억지로 꼬드겨서 볼 만한 영화는 아니다. 당장에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알겠지만 마루 밑 아리에티의 평판은 말 그대로 "마루 밑"을 기고 있다. 물론 모든 인터넷 평가를 신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필자도 '아무리 그래도 지브리인데...' 하고 영화관을 찾았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포스터에 붙어 있듯이 '아무도 몰랐던 10cm 소녀의 모험'은 차라리 아무도 몰랐다면 좋을 뻔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연출을 맡은 요네바네시 히로마사보다 기획 및 각본인 하야오의 이름이 포스터에 먼저 적혀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총론을 말하자면, 여전히 지브리는 하야오의 그늘을 못 벗어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스승에 대한 심리적인 의존을 넘어서 여전히 지브리에는 하야오만한 연출력을 가진 인재가 '전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비단 기획이 아니라 그보다 더 비중 없는 역할 -이를테면 단역 성우를 맡아도- 하야오의 이름이 감독이 누구냐보다 우선적으로 거론될 기세다. 이는 하야오가 없는 지브리가 얼마나 허약한 위상을 갖고 있는지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팝콘을 먹으며

 하나하나 아리에티를 뜯어 먹어보자. 일단 처음 영상은 나쁘지 않았다. 이 '나쁘지 않았다' 라는 의미는 '지브리다웠다'는 얘기다. 과거의 것을 답습하는 것은 조금 식상한 감이 있지만, 그 답습의 대상이 지브리이니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 적절하겠다. 물론 전작 "포뇨"에서 보여줬던 환상적인 영상미는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차분하고 애수에 젖은 그리운 지브리의 색감는 여전히 애잔하게 다가온다. 여기에 과거 지브리가 자주 보여주었던 서구식 양식이 배경으로 나온다. 주인공이 요양을 온 할머니의 저택은 유럽의 시골 별장과 다르지 않으며, 아리에티의 아버지는 하늘을 찌를 듯한 '미국코'를 자랑한다.-필자는 아리에티가 '튀기'가 아닐까 의심을 했을 정도다- 이렇게 등장 인물과 배경이 다국적 혹은 무국적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선생이 자주 썼던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심술궂게 생겼으나 밉지는 않은 조연, '고양이'가 등장한다. 지브리 스타일의 전형적인 셋업이라 하겠다.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자면 주인공인 아리에티는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소인족으로 아빠, 엄마와 함께 남자 주인공인 쇼우의 할머니의 저택에 불법 입주하고 있다. 그들에게 유일한 불문율이 있다면 '인간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 쇼우는 병약한 체질로 심장병 수술을 앞두고 할머니 저택에 요양을 하러 왔다. 이야기의 컨셉트도 그다지 흡잡을 것이 없다. 문제는 서툰 이야기 전개다. 소인족은 인간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아리에티는 영화 초장부터 쇼우에게 단번에 들킨다. 이 첫 만남은 중요한 부분이다. 서로 이질적인 두 종족의 접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에티와 쇼우의 첫 만남은 별 다른 에피소드가 없으니 긴장감이 뚝 떨어진다. 두 주인공의 첫 장면인데도 아리에티나 쇼우의 케릭터를 부각시켜주는 어떠한 장치도 없다. 꼭 '술김에 필름이 끊겨 눈 떠보니 여친 집이더라'하는 사연처럼 결말만 있고 무드가 없다. 쇼우도 마찬가지, 약 0.5초 사이 달아나는 아리에티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고 소인족의 존재를 단번에 믿는다. 그에게는 사람 모양의 조그만 생물이 있다는 쯤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쇼우와 아리에티에 대해 안타까운 점은 주인공이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데도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케릭터 일러스트는 쇼우와 아리에티 모두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리에티는 단지 귀염상이라기 보다는 생각보다 여성스러운 이미지이다. 그러나 일러스트에 비해 내면 표현에서 연출력의 부재가 여실히 드러난다. 쇼우는 심성이 착하나 병약한 소년이다. 경제적 형편은 부유한 듯하나 가족이 화목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리에티와 대화에서 드러나지만 쇼우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 쇼우의 내적 갈등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 갈등은 영화 내내 드러나지 않고 사건 전개에 전혀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감독인 히로마사는 쇼우 내부에 소용돌이치는 어두운 정서를 스크린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반면 아리에티는 내적 갈등이 전혀 없다. 영화 초반에 그녀는 인간에게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소인족의 금기를 어긴다. 그 때문에 가족이 정들었던 집을 떠나야 하고 그 와중에 엄마가 인간에게 붙잡히는 상황이 왔는데도 그녀는 이렇다할 죄책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쇼우를 만나 '우리를 아는 척하지 말라'는 아리에티의 심정은 죄책감이라기 보다는 어긋난 결과를 되돌려보려는 '책임감'에 가깝다. 또한 재봉틀 핀을 자랑스레 칼처럼 허리춤에 찬다든지 아버지를 따라 모험을 하는 장면 등에서 그녀의 개성이 가까스로 보이긴 하지만 그것도 중반부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물 묘사가 부족한 탓이다. 전체적으로 아리에티 예쁜 일러스트와 대조적으로 매력 없고 뻣뻣한 성격으로 비추어 진다.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개성이 이야기를 주도하기보단 플롯의 흐름을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느낌도 준다.



 케릭터를 부각시키는 것에도 실패했지만 이야기의 흐름와 케릭터의 관계도 썩 매끄럽지 않다. 소인족과 인간족의 만남 그 자체는 다양하고 재미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 소재이다. 특히 '마루 밑의 세계'는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결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장소라서 재미있다. "고양이의 보은"에서 도둑 고양이들이 사라지는 골목에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아리에티의 마루 밑도 충분히 판타지로 가득 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 내내 배경이 되는 것은 주로 인간의 저택, 즉 마루 위의 세계였다. 또한 쇼우와 아리에티의 '아이컨택'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심적 접촉의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그러다보니 인물들은 폐쇄적이고 의사 소통이 없다. 의사 소통이 없으면 대립도 화합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관객들이 감정 이입이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역시 사소하고 다양한 에피소드가 없다는 것도 가장 큰 결점이다. 중심 줄거리가 지나치게 단순하다. 단편 소설에 불과한 서사성을 억지로 늘여 만든 거 같은 지루함은 차치하더라도 그 사이에 인물 간 대립 구도나 갈등 구조가 뚜렷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 가장 적대적인 인물인 가정부는 아리에티와 일면식도 없다. 또한 그녀가 왜 소인족을 잡으려고 그렇게 애쓰는지는 맞며느리도 모르는 사실. 재봉질 바늘을 허리춤에 찬 아리에티의 액션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 줄거리 내내 이렇다할 위기는 아예 없다. '단지 소인족이 살았고 들켰고 도망갔다'로 단순히 요약되는 줄거리에서 무엇이 있을까? 이러니 쇼우와 아리에티의 이벤트도 생길리 만무하다. 키키, 포뇨, 센처럼 모험의 줄거리에서처럼 남녀 주인공이 보조를 이루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은 아리에티도 대략적으로 비슷하지만 이 둘의 유대감을 끈끈하게 만들어줄 계기가 부족했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결말 부분에서 왜 아리에티가 쇼우와 헤어지며 눈물을 흘리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둘이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비를 이겨낸 것도 아니다. 남자 주인공인 쇼우가 한 일이라고는 소인족을 집에서 내쫓은 일-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잡혀간 아리에티의 엄마를 구출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 전부이다. 아리에티 엄마가 잡힌 사건도 따지고 보면 쇼우 때문에 생긴 일이니 아리에티 입장에서는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다. 어쨋건, 남자 주연과 여자 주연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도 헤드샷을 당하지 않는 람보보다도 당연한 일이니 그렇다 치자. 본래 심장병을 앓고 삶의 의지가 없었던 쇼우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아리에티에게 "너를 보고 나도 수술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라고 고백한다.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은 뒷얘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쇼우가 아리에티에게 감화 받을 수 있는 사건도, 감화 받는 장면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비운에 빠진 남자 주인공을 각성시키려면, 대신 여자 주인공이라도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대속을 치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부정적인 케릭터에게 긍정적인 케릭터의 생명력이 전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남녀 주연들이 유대감이 가장 극에 달하는 시기는 한 사람의 고통을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이어 받거나 같은 위기감에 빠졌을 때다. 이 단순한 장치는 '지구 용사 선가드'도 알고 '세일러 문'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이마저도 빈약하다. 

 
영화관을 나서며

 단 한마디로 평가를 하자면 이 영화는 일러스트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맘에 드는 게 없는 영화였다. 마루 밑이라는 친숙하고도 낯선 배경, 소인족, 병약한 소년과 작고 귀여운 소녀라는 소재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흥미 요소를 비켜나가는 것도 재주라면 정말 요한 재주다. 아마도 이번 '마루 밑 아리에티'는 지브리 스튜디오 역사상 최악의 영화 중 하나로 당당히 뽑힐 수 있으리라 본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 선보인 동화적 감수성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가 그려내는 애절한 러브 스토리도, '붉은 돼지'에 느껴지는 낭만에 대한 애수도, '마녀배달부키키'의 발랄함도 없다. '역시 지브리는 하야오가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좋은 후임자가 없다는 것은 하야오의 불행이기도 하고 스승으로서 그의 부덕이기도 하다. 

 나는 지브리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지 않는다. 지브리의 형식은 있되, 지브리의 감동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돈과 시간이 충분히 남아도는, 조금은 부러운 족속들에게는 이 영화를 추천할다. 어쨋건, 복에 겨운 여러분들에게도 영화를 잘못 고르는 정도의 불행은 있어야 세상이 약간이라도 공평해지지 않겠나? 

 끝으로 그 동안 한껏 끌어올린 지브리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치 때문에 은퇴도 마음대로 못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께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