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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Doragraphycs/이슈번역

장벽의 붕괴 by 빅터 그로스만


by 빅터 그로스만

MRZine
2009년 10월 11일

 나는 심술 굳은 그린치-역주: 그린치는 만화 "How the Grinch steal Chrismas" 의 캐릭터인데, 크리스마스를 훼방 놓으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같은 소리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곳 베를린에서 라디오와 TV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연신 축하보도를 하고 있어서 기상예보를 할 틈도 없다. 기상예보에서는 불행히도 이번에 계획된 모든 행사가 불쾌하고 비가 오는 날씨에서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창가에 서서 나는 구름들과 부슬비를 향해 용감히 폭죽을 발사하는 시도를 보고 있었다.

 1989년도에 일어난 기묘한 일에 대하여 어떤 불평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때, 한 서독 지도자가 계획된 바 없이 보이는 발표에 의하여 문이 열리고, 대중들은 동쪽 베를리너에서 서쪽 베를린으로 달려나갔고, 곧이어 더 멀리 서방으로 갔다. 그것은 거대한 기쁨이자, 행복이고 소위 말하면 "먼진"이라고 불릴만한 표현할 수 있었다. 이 "먼진"의 뜻은 "미쳐 날뛰는, 제정신이 아닌, 믿을 수 없는," 이란 뜻이다. 그저 지금이나 아주 작은 불평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거대한 행사는 많은 이상가족들을 재결합시키고 동독인들이 프라하나 바르샤바와 모스크바만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서 베를린은 물론이거니와 파리와 워싱턴, 뮌헨을 갈 수 있었다. 이것은 정말로 기뻐해야 할 사건이다. TV는 얼싸안고, 기뻐하고 장벽 위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몇 천 번이나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감동적이었고 심지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주의자로서, 동독에 사는 역사를 분석하려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질적인 추억과 의심을 지워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가득한 환희의 순간이, 그 사건과 연루된 그들로서는 놀랍긴 하겠지만, 결코 그것만으로는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에게는 많은 일들과 질문들이 여전히 설명되지 않거나 심지어 묻지도 않은 채로 잔재해있다.

 왜 누구도 서독 시절, 그러니까 GDR-역주: 동독단독정부를 의미- 이 2차 대전 직후에 통일을 하려고 애썼던 것을 기억하지 못할까? 더구나 아데나워 수상-전쟁 직후 서독의 수상-이 냉혹하게 통합 선거를 비롯한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선 서독은 그들만의 주를 세우고, 군대를 양성하고, NATO에 가입하고 지금의 폴란드 영토인 거대한 땅을 차지하려고 권리 주장을 하고 있던 이후에야 이러한 시도들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왜 GDR이 분명히 경제 위기를 겪긴 했지만 그러한 위기가 오늘날 통일 독일의 위기보다도 미비하며 동독이 끝날 때까지 실직이 없고 홈리스가 없고 의료처방과 육아 시설, 교육, 삶의 충분한 안정적인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까?

 왜 여행 제한의 대부분이 지난 2년 안에 눈에 띄게 완화되었고, 서독을 갈 수 있었던 연금 수혜자뿐만 아니라 일, 이백만 명의 동독 시민들이 1987부터 1989년 사이에 서독을 방문했다는 것을 잊었을까? 젊은이들은 절실하게 여행하길 원하긴 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회도 이미 개선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편협하고 갑갑한 분위기가 GDR정부에 존재했었으며 이는 오래된 리더십과 소련정부로부터 상속된-혹은 강요된- 나쁜 전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일종의 편집증이 존재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서독에게 동독이 집어삼켜질 것이라는 것으로,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끝내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지리학적, 역사적으로 처음부터 독일의 가장 약한 삼분의 일의 영토,-역주: 동독의 영토는 전체 영토의 삼분의 일이었다-  GDR은 언제나 강력하고 무자비한 공격에 처해있었다. 이런 문제는 GDR의 지도자들에게 영원한 문제였고 그들은 결코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989년도의 운명적인 가을에 시위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시민들과 대항자들은 보다 진보적인 GDR정부를 원한 것이지 망한 정부가 아니었다. 그 이후에 챈셀러 콜, 일리 브랜드와 다른 서독의 지도자들은 동독 시민들에게 자유뿐만 아니라 그들이 TV쇼를 통해 부러워하며 보고 있었단 모든 소비재들, 간단명료하게 요약하자면 동독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서독의 마르크화와 바나나-서독의 화폐가치는 동독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비쌌고, 추운 지방인 동독은 바나나를 생산할 수 없었다.-을 약속하였다. TV쇼에서는 라인강의 로렐라이의 처녀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매혹적인 노래들이 동독시민들을 유혹하였다.

 많은 부분들은 독일 연방 정부의 시민인 그들의 상태에 맞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확실히 모든 소비재와 여행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선동적인 연설과 둔중한 신문기사는 사라지고 대신에 상투적이고 생기 없는 광고가 그 자리를 채웠다.

 자유를 얻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자유를 잃었다. 우스갯소리지만 GDR정부에서는 하네커-역주: 당시 동독의 대표적 지도자-와 그 외 정부와 정치가들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만 당신의 상사와 책임자와 공장 감독에게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요즘은 이것이 뒤집어졌다. 수당을 받지 않고 초과업무를 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동료의 임금에 대해 불만을 표하거나 회사 소유의 음식을 먹었다고 의심되거나 먹으면서 13센트 쿠폰을 내는 것을 잊은 사람들은 해고를 당했다. 거지와 부랑자들, 무료급식을 받는 사람들, 빠진 치아를 치료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방치되었다. 이는 GDR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현상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 닫은 공업지구와 연금수혜자들의 밀집지역에 나타났고 대부분의 젊은 이들은 어디든지 직업을 찾으러 멀리 떠났다.

 역사가에게 중요한 요인은 또 하나 있다. GDR 정부는 확고하고 기본적인 원칙에서 세워졌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에 대한 방비로써, 몇 년 동안 거의 대부분은 반 나치인사가 지배했다. 서적과 영상, 영화 심지어 거리와 학교 유소년 클럽까지도 사실상 반 나치인사들로 교체되었다. 이것은 서독 정부와 무척이나 대조적인데, 서독 정부인사들은 군대의 고관과 외교관 그룹, 대학 관련 인사와 경찰, 법관들로 모두 전 나치의 고위급 인사들로 가득 찼으며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심각한 범죄자들이었다. 1961년에 장벽이 세워질 무렵에도 그들은 여전히 지도층에서 주목할만한 위치에 있었다. 장벽이 무너질 즈음은 1989년도에 대부분 늙은 나치당원들은 은퇴하거나 죽었지만 히틀러 시대 때 전쟁으로 생긴 수 십억의 사람들과 수백만 명의 노예노동자들을 수탈하여 세워진 거대 기업들과 합동회사, 은행들이 여전히 대부분의 분야에서 강력하게 남아있었다. 장벽이 무너지자 그들은 동독과 그 너머 지역으로 벌떼 같이 몰려들었다. 체코 공화국과 폴란드, 루마니아 등이 목표였다. 전범자들이 양성한 서독의 육군과 해군은 여전히 군국주의자들이 지휘하였으며 그 병력들은 더 이상 GDR에 의하여 방해 받지 않고 아프리카와 근동과 아프가니스탄의 지역들에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 두 개의 전쟁이 치러졌다. 그리고 GDR이 칠레의 아옌데 정부, 베트남, 알제리야, 니카라과, 남부 아프리카의 ANC-역주: 남아공 민족주의적 정당- 와 SWAPO-남서 아프리카 독립운동조직- 를 돕는 동안 서독 연방정부는 항상 그 반대편에 서있었다.

 그렇다. 정부의 유력인사들에게 고통을 당했던 일반 사람들의 기쁨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현재 통합 독일의 부자들은 높은 빌딩에서 차갑게 수만 명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곳의 삼천 명과 다른 곳의 만 명을 해고하고 공장을 천마일 더 동쪽으로 옮기고 저 곳에 있는 공장을 폐쇄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거대한 독점 게임을 하듯이 말이다. 노키아와 오펠흐, 시에멘스와 제약회사들은 시장을 무기로 삼는다. 새로운 독일 정부보다도 더 많이 그들의 지배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말이다. 여전히 그들은 자유와 장벽에 대하여 환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 속에는 걱정의 기조가 없는가? 가장 최근의 위기는 결코 회복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조금은 더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 몇몇은 미디어와 그들의 연설을 비난하고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정당에 투표한다. 그 정당들이 심지어 때로는 사회주의적일지라도 말이다. GDR과 같이 많은 단점이 있는 체제가 아니지만 더 이상 고층 빌딩에서 독점 게임을 하는 자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체제를 원한다. 아마도 "우리는 최고다"라는 그들의 구호 속에 저러한 기발한 도미노 행사와 조금은 우중충한 불꽃놀이는 그들의 깊은 우려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소나일리 콜햇칼이 빅터 그로스만과 나눈 인터뷰 "베를린 장병 붕괴 후 자본주의의 실패(MRZine 게재, 2009년 11월 11일자)"를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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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터 그로스만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동독에 몇 년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강 너머에 -미국 좌파의 회고록, 냉전과 동독의 삶(메사츄세스 대학 신문, 2003년)의 저자이다.

 원문은 안상헌 선생님의 아크로 폴리스(
http://web.chungbuk.ac.kr/~ahnsah/)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