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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Doragraphycs/이슈번역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by Richrad Schmitt

ZCummunications에서 주관하는 새로운 사회를 상상해내는 모임(RSP)의 기고문

 Ehrenreich @ Fletcher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나아가서 조직을 만들라고 말한다. “우리는 조직을 결성하여서 그 안에 확실한 사회주의자들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리더십과 지역적인 투쟁을 진보시킬 능력을 수행해야 합니다.”  유창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이 지시를 따랐으나 우리의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조직화를 명하는 것은 절망적인 충고였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을 조직화하려는 150년의 세월 동안 사회주의에 대한 진척은 더 이상 없었다. 사회주의자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시도는 없는가?

 “울지 말고 뭉치자!” 라는 구호는 어떻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정교한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다.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의 대중 소유화를 주장한다. 생산 자원의 사회화는 자본가들이 사회에서 더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는 한 불가능하다. 독일의 사민당은 100년도 전에 이렇게 발표했다.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 권력 없이는 경제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하여 경제 투쟁을 이끌지 못한다.” 공산주의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투쟁을 “민중의 승리”로 언급했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가 가진 역사에 대한 견해를 따르면 계급 투쟁은 끊임없이 자본주의 사회를 뒤흔든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의 지배층과 노동자 계급은 제로섬 게임에서 각각 힘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한다. 이 제로섬에서는 상대방의 대가 없이는 힘을 얻지 못한다. 사회주의적 노선에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들보다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운동의 목적은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갖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는 노동자와 고용주가 임금과 노동조선을 싸우는, 명백한 권력의 투쟁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고용주들은 더 적은 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열악한 노동조건을 노동자에게 강요하기 위한 물리적인 힘을 원한다. 그에 비하여 노동자들은 이러한 압력에 저항하고 그들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힘을 키울 것을 원한다. 그러나 여기서 임금 노동자와 자본의 소유주와의 갈등이 생긴다. Branko Horvat가 언급했듯이 이러한 갈등은 자본주의 내에서 생기는 것이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어려운 시기에 일자리를 위협당하자 기꺼이 임금을 양보하는 자발성을 보라. 미국의 노동 조합은 사회주의에 대하여 노골적인 적대감을 빈번하게 드러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노동 조합은 사민당이 사회주의 진보를 위한 방법들을 주장할 때마다 언제나 우유부단하게 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가들과 싸우기도 하지만 또한 그들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합원들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단기적인 목표를 성공시켜야 한다. 그들은 임금과 노동 조건을 협상하기 위하여 자본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내에 권력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혼동하는 실수다.

 공장 안에서 하는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가들을 압도하는 힘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한 이름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명백한 결점으로부터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실상 오늘날 “사회주의”가 매우 탄력적인 용어라는 것은 명백하다. 사회주의의 매우 일반적인 하나의 특성은 모든 시민들이 투자 자본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나 노동 시장의 폐지에 대하여 광범위한 동의를 이룬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은 상품이 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함께 매우 일반적으로 경제적 용어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종말 이후에 올 사회에 대한 또 다른 기대감(목표나 희망, 이상으로써)의 범주를 말한다. 사회주의는 또한 조심스럽게 정의 내려진 다양한 경제 계획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혹은 좋은 사회 등을 이루기 위한 변화와 대안적 사회에 대한 매우 잘못된 사상의 집합체를 말하기도 한다.

  경제 계획 중에는 한편으로, ‘시장 사회주의 이론”이 있다. (종종 이것은 “경제적 민주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또 다른 것으로 ‘민주적 계획’이 있다. 시장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일자리는 노동자에 의하여 소유되고 진행된다. 그러므로 노동의 상품화를 없앤다. 자본은 더 이상 사적 소유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설정된 투자 우선권에 따라서 정부 투자 은행의 지점들이 분배하게 된다. (혹은 예를 들자면 미국의 국회에서 일어난 일을 들 수 있다.-역주 : 이는 오바마 정부가 금융가를 살리기 위해 대규모 예산을 배정한 일을 풍자하는 대목이다.-)

 ‘민주적 계획 이론’은 노동자가 일자리는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은 기획한다. 그러나 덧붙여 말하자면 이 계획은 시장의 사회적 여파에 대한 우려를 깊게 나타낸다. 생산을 계획하고 자원을 분배하는 시장의 용도를 대신하여서 생산과 소비에 대한 계획적이고 복잡한 체계를 만들었다. 이 체계는 지역의 이웃 협동에서 시작하여서 시 단위, 도 단위, 지역, 국가 단위로 올라간다. 게다가 시장에 대한 논란과 함께 이 ‘민주적 계획’은 모든 사람은 각자의 흥미 있는 노동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오직 모든 이들이 또한 흥미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떤 사회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 중 일부를 수행해야만 이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또한 민주적 계획 이론은 모든 이에게 흥미 있는 노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매우 복잡한 근로 배치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의 세 번째 모습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의 경제를 전망한다. 이러한 기업의 재정은 특별한 투자 은행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은행의 주식은 화폐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쿠폰을 이용해야 한다. 모든 시민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양의 주식을 받고 은행 이윤의 몫에 대한 자격을 얻는다. 이러한 주식 제공은 사회의 재정 자원을 소유한 소수의 지배 계급을 폐지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쿠폰 시스템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경제적 총 이익의 한 지분을 갖게 하니 위한 매커니즘이다.” 쿠폰은 상속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소외를 확대시키며 부당하기 때문이다. Philipe Van Parijs는 모든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수입을 줌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세 가지 실패를 고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원하지 않는 일자리와 실업과 휴가를 가는 것 등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소외된 노동을 할 것인지 아닌 지에 대한 선택권을 갖게 된다. 이것은 더 큰 창의성을 북돋는다. 왜냐면 기초재원의 보장은 사업자들이 혁신적인 기획을 하는 데 적은 위험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기초 수당은 “사회주의”라고 부르진 않지만 이것의 효과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산 자원 통제권을 이양하는 것과 거의 같다.

 이러한 다양한 경제적 정책의 제안자들은 목표에 대하여 확고하다. 노동자가 통제하는 기업들은 노동 상품화를 종식시킬 것이다. 임금 노동은 모든 이가 노동자이면서 주인인 한 더 이상 상품이 되지 않는다. 투자 자본이 정부에 의하여 분배되고 투자 우선권이 만민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결정될 때 자본가 지배 계급은 사회에서 사라진다. 경제를 결정하는 권력은 소수의 지배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유권자 모두에게 이양된다. 구가의 투자 자본을 모든 이에게 분배하는 까닭은 모든 구성원들의 최대발달을 가능케 하는 사회를 조성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또한 ‘민주적 계획’이 제안한 매우 복잡한 노동 분배의 목표이다. ‘민주적 계획 이론’은 모든 이가 흥미 있어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이가 기피하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경제적 계획으로서 사회주의는 이러한 논의들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렇게 계획된 경제안의 목적들을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투자 자본이 만민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다수가 동의하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이론가들이 투자 자본의 통제에 대한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동의할 지는 명확하지 않다. 비록 어떤 이는 이것이 사회주의의 정수라고 생각하지만 노동 시장을 없애는 것을 모든 이론가들이 원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개발은 사회주의의 중요한 목표로서 가끔 언급되지만 모든 사회 이론가들이 모든 이에게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정교한 정책을 계발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제 기획이 사회주의의 부분적인 외형뿐이라는 것이고 적어도 논의된 몇몇의 작가들은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시장 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이나 주식 시스템 같이 국가적 투자 은행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다양한 목표들은 독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경제적 기획은 오직 다른 사회주의적 목표들이 달성한 이후에야 기대할 수 있는 기능들로 보여진다.

 이러한 다음의 특징들은 때로 사회주의에 속한다. 그것은 사회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증폭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공동체를 만들 것이다. 사회주의적 집단의 깊은 연계는 공동체의 윤리가 사회주의적 집단에 스며들 수 있는 희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시스템은 이기심을 부추긴다. 사회주의자들은 공동체의 연대감에 의해서 행동하다. 그들은 이웃의 요구를 자신의 것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다. 현존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이 개인이나 정부에게 폭력에 당하거나 자본주의의 야만성에 피해를 입는 것을 수수방관하기도 한다. 더 일반적으로 많은 이론가들은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깊은 도덕적 타락에 대하여 개탄한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개인의 이득을 다른 이의 이득이나 전체로서의 공동체의 이득보다 더 우선시할 것을 각각에게 강요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부당한 방법으로 우리의 권리를 증진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유혹을 상당 부분 제거한다. 게다가 노동은 성숙된 사회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고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노동이 유희”가 되는 사회를 원한다. 소외감은 자본주의 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스며들었다. 그러한 양태들 중에 하나로 소외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보다 좋은 조건으로 살 수 있게끔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여가 공간을 빼앗았다. 모든 이의 창의성을 증진시키는 것은 사회주의의 또 다른 목표이다. 마지막으로 확장된 자유와 정의는 사회주의 사회를 대변하고 있는 생각이다.

 “사회주의” 는 주로 경제적 계획 부류를 지칭한다. 어떤 것은 크게 정의해서 희망과 기대, 바람과 이상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 다른 이론에 비하여 좀더 발전된 것이다. 경제적 사회주의 계획에 있던 어떤 작가들은 이전의 글에서 언급했던 생각들이 노동 시장이 폐지되고 모든 시민의 바람에 따라 투자 자본이 분배됨으로써 자동적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믿지만 나는 이것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 반대의 생각이 맞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 생각이란 만약 시민들이 자본주의적인 개인주의를 스스로 멀리하지 않으며 공동체의 윤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노동 시장의 폐지와 대중들의 연합 결정하거나 시장을 제한적이고 신중하게 조정하는 수단으로써의 경제 계획이 자본주의적 부패의 양상을 되풀이 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공동체의 윤리를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없다면 시장 사회주의 내에서 노동자 소유 회사간의 경쟁이 오늘날 자본주의 기업들의 경쟁만큼이나 파괴적으로 변할 것이다. 노동자 소유의 회사가 경쟁사에 의하여 덜 가난해질 수 있다는 것과 현존하는 자본주의 독점처럼 그들을 집어삼키고자 한다는 추측을 확신할 이유는 아무데도 없다. 무엇이 시장 사회주의에서 시장이 소수 독과점 형태를 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 정부에서 독점 금지법은 확실히 자본가의 수중에 있다. 소수 독과점은 매우 빠르게 성장한다. 정부의 독점 금지 움직임이 현재 미국의 형태보다 덜 부패할 것인가? 사회주의 시장에서 시장을 움직이는 자들이 자본주의의 지배자들보다 좀 더 대중적인 열정이 없다면 물론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로 논쟁할 여지는 전적으로 없다. David Scheickart는 경제적 민주화 체제에서 회사의 목표는 노동자이자 소유자인 개인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에서는 기업의 목표는 소유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기업은 성장을 추구하다. 성장이란 그만큼의 자본가들이 다수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허용케 하는 것이다. 경제적 민주화 체제에서 기업은 이윤을 낼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총 수익이 많은 노동자이자 소유자인 이들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본가의 이익은 확장될 수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그렇게 되지 않는다. David의 생각에는, 경제적 민주체제는 다른 회사에 대해 덜 경쟁적이다. 시장 정세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 있을 때보다 홉스주의- 역주 : 만인에 의한 만인의 경쟁-에서 보다 자유롭다. 그러나 심지어 Scheickart도 다음을 인정했다. “다수의 노동자가 그들의 동료를 해고시키려고 투표하고 높은 보수를 받는 노동자들을 적은 보수로 받는 이들로 대체할 이록적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자연히 형성된 공동체는 이러한 행동을 상당히 완화한다. (My Italics에서) 대규모 협동 조합의 모든 사례를 보면, Mondragon이라는 미국 북서쪽에 있는 목재 협동조합과 the kibbutzim라는 북 이탈리아의 협동조합은 임금 노동자를 부리고 있다. 이 임금 노동자들은 조합의 소유자가 아니며 조합원 노동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 경제적 힘은 단독적으로는 민주적 경제체제의 이득을 모든 이들에게 줄 수 없다. 도덕적 변화가 사회주의 조직의 설립보다 선행해야만 한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민주적인 계획 과정이 오늘날의 미국이나 영국에서 선거 관리부의 부패한 세금 분배처럼 오염된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민주적 계획 체제의 사회가 우리보다 공동체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만약 사회주의적 인간이 완전히 우리와 같다면 Lenin과 john Roemer가 주장했듯이 투자 자본의 분배는 현행하는 거대 은행들과 산업 기업들의 구조조정 자금만큼이나 부패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 자체로는 경제적 사회주의 계획이 더 좋은 세상으로 인도할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만약 사회주의의 시민들이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라면 공공 자산의 분배는 거대 자본 기관에게 공적 자금의 대부분을 지출하는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것-역주 :  미국의 금융 구제와 같은- 과 매우 흡사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새로운 기관을 세우는 것이다. 모든 기업들이 거기에 속한 노동자들이 소유하는 경제체제는 세워질 필요가 있다. 경제적 계획이라는 범국가적 체계는 필수 조직과 계획 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관리 집단이 필요하다. 국가적 투자 은행이 설립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모든 혹은 몇몇 기관들을 설립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노력하고 바라는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충분치가 않다. 우리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이처럼 새롭고 상이한 기관은 그것을 만들고 유지할 인간의 전반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사회주의는 새로운 조직체제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

 사회주의에서 요구하는 인간 본성의 변화는 Wilhelm Reich의 “노동자 운동이 계속 실패하는 이유 대한 폭넓고 철저한 분석”의 요구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일반적인 이론가들은 이러한 실패를 노동자들이 가진 “허위 의식” 탓으로 돌리고 노동자들의 상황과 그들의 이익에 대한 잘못된 신념으로 이를 설명해왔다. Marcuse는 허위 의식에 대하여 더욱 복잡한 이론을 제시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왜곡했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사람들은 좋은 삶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인간 존재에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진다. 이것은 지적인 혼동이 아니다. 인간의 욕구와 감정은 잘못 인도되었고 자기 파괴적인 태도를 보인다.

 Reich의 말은 Marcuse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들의 발상은 비슷하다. Reich는 마찬가지로 독일 노동자들의 정서 속에서 정치적 실패의 원인을 찾았다. 독일 사회는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었다. 성적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고 성적 욕망은 검열 당했고 무거운 죄책감이 부여되었다. “그 결과는 보수화, 자유에 대한 공포, 보수적인 생각 속에 가두어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Marcuse가 생각한 것처럼 모든 욕구를 왜곡시켜서 우리를 묶어둔 것이 아니라 성적 욕구를 확실히 억압한 것이다. 이 두 연구자들은 Gibson-Graham이 주장했던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정서와 인간성 안에 고정되었다라는 생각을 내포한다. 이러한 말은 Wilhelm Reich의 언어를 쓰면 “성격 구조”라고 말한다.

 인성이나 “성격 주고”에서 필수적인 몇 가지 변화들은 Gibson-Graham이 공장들이 떠나간 호주의 산업지구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했던 행동 실업에서 제시된다. 그들의 처음 느낀 감정은 일종의 절망감이었다. 사람들은 희생 당했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Gibson-Graham이 발견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피해의식 속에 함몰되었고, 이 감정을 버리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또 그러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 분발하기 전에 그들의 인성이 변해야 했다. 피해자라는 스스로 부과한 이미지를 버리자 개인적으로든 단체로든 그들은 좀 더 스스로의 가능성과 능력에 대해서 긍정적일 수 있었다.

 사회주의 사회를 위한 인간의 변화는 도덕적인 변화를 초월한다. 사람들은 무엇이 “자연적”인가와 “무엇이 의식을 만드는가” 라는 질문들에 대한 관념만큼이나 그들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진지하게 받아들일만한 사안이 아니다.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자연적”이다. 이 생각이 어떻게 세계가 돌아가고 있고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공동체 원칙에 기반을 둔 사회는 그저 달콤한 꿈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당연히 무엇이 “자연적” 으로 보이는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변할 수 있고 변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지 잘 모른다. 근본적으로 사회적, 정치적인 변화가 있기 전에 자연에 대한 생각과 실재 관념, 혹은 적어도 무엇을 할 수 잇는지 혹은 무엇이 한낱 공상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과는 다르고 더 좋은 세계를 향한 방법으로서 제시한 네 가지 정도의 인간성의 변화를 보았다. Reich에 따르면 성적 욕구의 억압이 그 근본 원인이었다. Marcuse는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드는가에 대한 대중의 욕구에 대하여 설명했다. Gibson-Graham은 인간성의 또 다른 중대한 측면을 지적했다. 이 측면이란 희망을 갖는 인간의 능력이다. 그녀는 또한 현실이 무엇을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사회주의적 공동체가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노력해도 될만한 것인지 혹은 인간 본성에 의한 불가피한 투쟁인지에 대한 인간이 가진 이해의 차이에 주목했다.  이러한 가설들은 타당하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주제가 좀더 세세한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는 것 또한 명백히 한다. 누군가는 사회주의는 인간 본성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으나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Naomi Scheman은 어떻게 사람들이 근본적 변화를 경험하는가, 라는 의문을 던졌다. 그녀는 한 여성의 경험에서 이를 찾았다. 그 여성은 의식 고양 집단에 참여하는 중에 그녀가 전적으로 그녀의 아버지에게, 남편과 형제 그 외의 남자들과 가부장제에 대해 매우 화가 나있음을 발견했다. 전에는 그러한 분노를 느끼지 못했었다. 이런 분노를 깨달은 이후에 그녀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남성과 가부장제도에 대한 분노는 지금이야 수용할만한 것이지만 과거에는 엄격하게 금지했었다. 그녀에 생각했던 좋은 삶이라는 관념이 좋은 주부와 어머니, 남자의 내조자가 되는 것에서부터 그녀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렇게 새롭게 나타난 분노가 허용되었다. 분노를 인식하면서 그녀는 인생의 목적과 가능성에 대한 관념을 획득했다. Scheman이 주장하는 바는 개인 여성의 위와 같은 변화가 그들이 집단 내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다른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그들 자신에 대한 재평가는 오직 동질감을 느끼는 집단 내에서 일어난다. 여성들의 분노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설립하면서 양지로 나왔고 또 삶으로 다가왔다. 이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라는 것은 의식 고양 집단을 말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수명은 이러한 분노를 억제하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주기적인 경제 위기와 제국주의적 전쟁이 만들어낸 개인의 혼란뿐 아니라 환경 오염이나 소외, 자본주의의 착취가 불러오는 분노이다.

 지금까지 Scheman은 다른 이론가들이 주장했던 성적, 욕구의 변화와 희생자 역할과 수동성의 포기라는 테마에 또 다른 변화를 이야기했다. 이것은 무엇이 가능한지, 무엇을 희망할 것인지에 대한 통념의 변화를 말한다. 그녀의 설명은 중요한데, 여성들이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변화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비록 항상 명료하게 예상되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인간성의 왜곡이 비인간적인 경제와 기술발달의 권력을 야기한다는 Marcuse의 주장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중요하다. 반면에 2차 여성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개인들은 여성의 인성 변화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여기서 Scheman은 좀 더 나아가 매우 중요한 질문을 제기했다. 1970년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여성들이 그들의 분노를 확인하고 표출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개인의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불가피한 환경이 2차 여성주의 운동을 전개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이 이를 발전시켰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 분명한 가설이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났을 당시 비행기와 선박을 건조하고 군장을 만들었던 여성들이 전후에 가정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전혀 다른 여자였다. 그들이 스스로가 Levittown의 주부가 되고 거의 육아에 메여있을 때 변화를 향한 압력은 강력했다. 이러한 가설들이 분명 명료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 어떻게 위처럼 될 수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Scheman의 관찰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변화는 역사가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Reich, Marcuse, Gibson-Graham과 그 밖의 이론가들은 인성이란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한다. 그러나 Scheman는 역사적 조건이 반드시 호의를 베풀어야만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제 언급하게 될 마르크스 또한 이를 주장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가 생각한 역사적 조건은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다. Scheman 역시 언급하는 역사적 조건은 2차 여성주의 운동의 절정을 말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장 절실한 역사적 조건은 재배적 가치의 근본적으로 변화를 내포한다. 사회와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 인간성에 대한 변화는 대중의 가치와 견해가 완전히 바뀔 때에만 일어난다.

 Scheman의 관찰과 Gibson-Graham의 연구는 여성 운동의 경험과 사회 내부에 대하여 얻어온 근본적 변화에서 유래된다. 이러 변화는 단절되어 있는 사건들이 아니다. 동시대에 존재한 미국 사회의 흑인들의 위치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으면 그 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시대 초기에는 동성애자는 부끄러운 것이었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감추어야만 했다. 오늘날 게이의 권리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격렬히 반대하고 있긴 하지만, 서서히 증진되고 있다. 게이들의 결혼에 대한 견해를 묻는다면 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그게 뭐 어때서요?”라고 대답한다. 가치는 급격하기 변한다기 보다는 오랜 시간 동안 변한다. 뼈 속 깊숙이 고착화된 태도는 변화한다.

 Gibson-Graham은 이러한 역사적 변화가 계획된 것도 아니며 핵심적인 조직화에 의한 것도 아님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들의 기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러한 변화를 목격한다. 인종 차별, 성차별, 상이한 성적 취향에 대한 사회통념의 급진적인 변화는 전혀 명쾌하지 않다. 누군가는 이러한 선택 이면에 있는 원동력에 대한 전적인 이해가 없이도 변화의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통찰력은 저마다의 중요한 암시를 하고 있다. 가끔은 다양한 사람들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사회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왜 그 시대에 그들이 했던 노력이 성공했는지는 전혀 명백하지 않는다. 흑인들은 그들이 미국 해안에 발을 디딜 때부터 줄곧 노예 제도에 저항했었다. 왜 그들은 2차 대전 후에 해방 운동의 진척이 있을 때까지 참아야만 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여성들과 동성애자에게도 적용된다. 이전에 행했던 모든 캠페인을 보다 더욱 성공적으로 이끄는 궁극적인 요인에 대해서 확실한 것이 없다. 어떤 변화가 미래에 일어날 것인지를 예상하는 것과 혹은 우리가 바라던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명백히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노동자들은 수 세기 동안 착취와 소외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왜 그들은 아직 성공하지 못하는가? 자유를 위한 싸움이 열매를 맺었다가도 실패로 끝나는 것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생각보다 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고, 이를 지배하라고 과감하게 주장했다. 오늘날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없어 보이며 역사적 사건들이 이를 반박한다. 우리는 역사 이전의 더 겸손한 자세로 돌아간다. 앞서 인정 했듯이 우리는 역사를 매우 불완전하게 이해한다. 세계를 개선하고 자본조의 경제 체제의 잔혹함에 저항하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한 것이지만 성공을 증명하는 어떤 사건, 혹은 그 시간 이전에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러한 결론은 기본적으로 만족스럽지 않게 느껴진다. 여전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과학적” 맑스주의자들의 전통적인 견해는 버려야 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어느 지점에서 다른 방향까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설명한다. 또 다시 여성주의 운동을 살펴보자. 이 운동은 계획된 것도 아니고 힘 있는 지도자가 이끈 것도 아니다. 여성주의 운동은 그 목표가 불확실했다. “생산 수단의 사회화” 같이 하나의 문구로 통합되는 확실한 목표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각성한 여성들이 그들이 있던 곳, 그리고 성적 비하가 일어났던 장소마다 가서 저항했다. 그들은 여성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는가에 대한 아무런 규칙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다른 장소에서 각각의 방법으로 해방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의 삶은 변했다. 그리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투쟁이 열매를 맺은 건 아니지만 전체로서의 운동은 성공했다. 이와 비슷하게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건설”을 하려고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허용된 방법으로 상처가 견딜 수 없어서 저항이 정말로 불가피해 보이는 곳에서 자본주의에 대항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회와 삶의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단체의 시도들은 사회주의 운동과 결실을 맺을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 주장에서 “시대의 모든 오물을 제거해야만 성공할 것이고 새로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적합해질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며 어떻게 건설되는 지도 모른다. 우리의 임무는 점차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뒤죽박죽이 되고 불확실해진다. 우리가 있을 수 있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어떤 방법으로라도 스스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새로운 조직을 시도하기 위해, 그리고 신념을 지키고 희망을 앗아가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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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안상헌 선생님의 아크로 폴리스(http://web.chungbuk.ac.kr/~ahnsah/)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