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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악 VS 악 - 더 헌트와 도그빌 비교하며 보기





더 헌트, 토마스 빈터베르그 연출/매즈 미켈슨 주연, 2012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 연출/니콜 키드먼 주연, 2003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더 헌트>를 보고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을 떠올렸다면 조금 빗나간 것이다. 애초에 도그빌의 내용이 집단이 약자에 대해 얼마나 비도덕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 촛점을 맞추었다면, 더 헌트는 군중에 의한 도덕적인 심판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낸다. <도그빌>의 그레이스와 톰이 설정한 선의 관념적 승리가 현실적인 악의 유혹에 어떻게 타락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에 비해 <더 헌트>는 처음부터 사람들의 내면에 감추어준 어두운 그림자를 묘사하고 있다. 평화로운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덴마크 시골의 아름다운 경치와 대조적이게도 어쩐지 침울해 보이는 그늘진 산자락과 사람들의 사냥하는 습성은 아무리 문명화되어도 그 속에 숨겨진 공격성은 지울 수 없다는 메시지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 공격성은 문명화된 인간에게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서만 드러난다. 영화의 큰 제재인 '사냥'이 그렇다. 영화 속에서 사냥이란 성인들만 할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성인임을 보여주는 통과의식이기도 한데, 이것의 본질이란 저항할 수 약자를 집단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냥의 목적은 식량이 아니라 집단의 동질감 회복 및 단순한 유흥에 지나지 않는다. 감독인 토마스 빈터베르그가 실제로 덴마크인들의 사냥 의식을 보고 이 영화의 모티브를 따온 것인지, 아니면 소재를 정한 후 이 제재를 차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의 집단적인 야만성을 사냥에 비유한 것은 적절하다.



식량을 자족하기 위한 수단에서 일종의 관례로 남은 사냥은 문명에 숨겨진 인간의 공격적인 본능을 암시한다.



이러한 문명화된 공격성은 일반적으로 동종에 대한 살해 욕구를 거세된 채 사냥과 같은 ‘살해놀이’에서만 공공연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억압기제를 누그러뜨린 ‘약간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이것의 야만성을 되찾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을사람들의 사냥 대상이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전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하나는 대상의 철저한 고립이며 두 번째로 폭력을 정당화할 명분이다. 이 두 조건은 동시에 뒤엉켜 일어나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로서 강화된다. 말하자면 루카스는 도시에서 학교 선생을 하다가 이혼한 뒤 귀향에서 유치원 교사를 하는 처지로 마을 사람들과의 유대는 겉보기보다 깊지 않다. 심지어 테오(루카스의 가장 친한 친구)의 어린 딸 클라라가 악의에 차서 던진 거짓말에 아동성폭력자로 몰릴 때도 아무도 그를 변호하지 않을 정도인데, 이 일을 계기로 루카스는 더욱 고립된다. 유일하게 그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테오 역시 자신의 딸을 믿고 루카스에게서 등을 돌린다. 이러한 루카스의 고립은 반대로 마을사람들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고 그들은 루카스의 성범죄를 기정사실화한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루카스를 변호했던 사촌의 노력은 허사였다. 


‘루카스가 아동성폭력범일지도 모른다’에서 ‘그는 파렴치범이다’라고 속단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루카스를 점차 노골적인 폭력과 고립으로 몰아넣었다. 그러한 린치는 루카스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보복이었기보다는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아귀를 짜 맞추기 위한 정당화에 가까웠다. 즉 그들은 스스로 저지른 일에 대해서 ‘그가 나쁜 짓을 저질렀으므로 이러한 일을 당해도 싸다.’라고 생각에서 ‘그가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당할 리가 없어.’로 바뀌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강화한다. 이러한 광신은 자신의 행동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편함과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사태를 이야깃거리로 만든다. 이쯤 되면 현실의 복잡한 구조와 의심스러운 단서들은 생략되고 진실은 사람들의 담화 속에서 규명된다. 약간의 진실(루카스가 이혼을 하고 낙향을 했다는 사실과 어린 아이가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것을 고백했다는 것)이 불순물처럼 섞인 거짓은 순수한 진실보다 솔깃하게 들리는 법이다. 그리고 이를 수레바퀴 돌리듯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집단의 동조는 개인의 합리적인 의심으로는 어쩌지 못할 강력한 관성을 얻게 된다.



한때 선의로 묶였던 그레이스와 도그빌의 관계는 그레이스가 약자의 위치에 몰릴수록 가학적으로 변한다. 그레이스의 탈출을 도와주기로 한 사과장수가 댓가로 그녀를 강간하는 장면.



이러한 집단적 합리화는 <도그빌>에서도 발견된다. 도그빌의 마을 남자들이 그레이스를 윤간을 하고 개처럼 묶어 감금했을 때도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군중에 함몰된 인간의 몰인간성에 착상을 해 도그빌을 만들었다. 빈터베르그의 <더 헌트>는 시각을 조금 달리하여 사소한 계기만으로 이빨을 드러내는 집단의 야만성을 필름에 담았다. 도그빌의 사람들이 집단적인 도덕적 불감증을 앓고 있다면, 더 헌트의 마을 사람들은 집단폭력의 역동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증세는 대중, 혹은 군중이라고 불리는 집단화된 인간들이 두루 갖고 있는 잠재적인 악이다. 이 악의 씨앗은 개별적 인간이 양심이나 윤리에 의지하여 거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도그빌의 그레이스는 결국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죽음의 심판을 내린다. 그레이스의 행보는 묵시록적이다. 그간 도그빌 사람들의 사악함을 대속하듯 고난을 감내하던 그녀는 마을의 마지막 양심이었던 톰의 타락에 아포칼립스적 멸절을 결심한다. 구약에 보면 다윗에게 한 하나의 선한 자가 있다면 불덩어리를 내리지 않으리란 약속은 톰에 의해 깨지고 마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도그빌은 없어져야 마땅하다고 읊조리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다. 



"Good bye, Tom." 그레이스는 모든 마을 사람들을 심판하고 손수 톰까지 처단하고 만다.



한편 <더 헌트>의 결말은 보다 열려있다. 루카스는 크리스마스 날 성당에 찾아가 사건의 제1의 피해자이자 루카스의 친구인 테오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날 밤 클라라의 고백에서 루카스의 무죄를 확인한 테오는 더 이상 마을사람들의 ‘인간사냥’을 목도할 수 없음을 결심한다. 이미 신뢰는 무너졌고 집단적인 광기를 회복하기에는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테오는 한때 친한 친구였던 루카스의 불행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결국 테오의 사과를 받아들인 루카스. 그리고 1년 후 루카스의 아들 마커스가 성인의례를 거치게 되고 다시 관계를 회복한 마을 사람들과 함꼐 있는 루카스가 앵글에 잡힌다. 마커스에게 축하의 노래를 합창하는 마을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면 루카스의 얼굴에는 많은 감정들이 스쳐간다. 다시 예전처럼 마을의 죽마고우로 돌아갔지만 그들은 언제고 누군가를 사냥할 수 있는 포식자인 것이다. 이것은 루카스가 마을 사람들을 용서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공격적인 본성에 대한 체념이기도 하다. 루카스를 사회적으로 살해하려는 그들의 사냥은 불발로 끝났지만, 사냥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다. 매년 성인식이 되면 열리는 사냥처럼 이것은 되풀이될 것을 예고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내 눈을 보라고! 아무 것도 없잖아." 테오와 멱살잡이를 하며 자신의 고통과 결백을 하소연하는 루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