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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굿 윌 헌팅, 구스 반 산트 감독/맷 데이먼 주연, 1997




천재에게 투영된 대중의 욕망, 그리고 성장의 의미

굿 윌 헌팅, 구스 반 산트 감독/맷 데이먼 주연, 1997



 사실 <굿 윌 헌팅>의 시나리오가 독특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시작부터 이미 주인공의 운명은 예정되었고 그의 조력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친구들, 그를 도우려는 교수들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늦깎이 사춘기 소년의 껍데기를 벗기는 도구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심지어 연인 스카일라 역시 그의 유토피아적 종착역일 뿐 주인공과 대등하지는 않다. 어차피 저 놈은 잘 될 거야. 요는 어떻게 그렇게 되냐는 말이지. 이미 영화 도입부부터 관객들은 대략의 구도를 예상한다. 답은 이미 정해졌어. 넌 대답만 하면 되어. 뚝딱뚝딱. 설계도에 따라 주인공이 바쁘게 움직인다. 주인공과 조력자들은 진부한 갈등을 진부한 방식으로 해결해나간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할 일이 있다면 느긋하게 팝콘을 먹으면서 맷 데이먼이 누구나 파악할 수 있는 플롯에 얼마나 충실히 따라갈 것인가를 구경하는 일뿐이다.



주인공 윌 헌팅. MIT 최고의 석학도 해결하지 못하는 증명마저도 애들 장난 같다고 하는 그이지만, 잘 살아야 겠다는 의욕도 목표도 없다. 한마디로 멘탈 시망.



 예정된 영웅의 등장, 그에게 처해진 장애와 이를 해결하려는 주인공과 조력자들의 노력, 결국에는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이런 구도는 사실 성장 드라마에서 자주 보여주던 그것이다.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주인공은 확실하게 자신의 장애를 어필해야 하고 그것이 곧 자신의 미래에 암울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한다. 한편으로 그 장애는 극복가능하다는 암시 역시 놓치지 않는다. 진실한 마음과 사랑은 ‘힐링’의 기본 성분이다. 주인공은 깨달음과 동시에 각성을 하고 영화는 행복한 분위기로 전환된다. 굿 윌 헌팅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드라마였고 그 덕분인지 1998년 아카데미를 휩쓸었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지 않지만 충실한 매너리즘은 승리한다.


 재료보다는 양념이라고, 굿 윌 헌팅의 감칠맛은 설정에 있었다. 맷 데이먼이 하버드를 재학하던 시절에 썼던 각본을 원작해서인지, 영화 곳곳에는 캠퍼스에 대한 환상과 낭만적인 반항심이 드러난다. 청소부 윌은 “매학기 19만 달러씩 버리는” 하버드생과 애들 자신에게 장난과 다름없는 수학문제를 증명하지 못하는 수학자 램보 교수를 비웃는다. 그는 대학교수란 따분하고 쓸모없는 권위에 집착하는 자들이며 남의 생각을 자신의 이론처럼 읊어대는 돈 많은 머저리라는 취급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MIT의 주변을 맴돌면서 고난도의 수학문제를 풀어 인정을 받으려는 이중성을 보인다. 숀 교수가 윌에게 “청소부는 어디서든 할 수 있어. 그런데 왜 하필 세계 최고의 MIT에서 일하기로 했지?”라고 묻는 대목은 윌의 이중적 욕망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정신 치료를 담당하는 숀 맥과이어 교수(로빈 윌리엄스)는 윌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심리 치료를 시작한다.



 주인공과 관객은 엘리트에 진입하지 못하는 좌절감과 한편으로 그 안에 편입되고픈 내밀한 욕망을 공유한다. 비범한 재능을 가졌지만 대학 청소부나 벽돌공과 같은 육체노동을 하는 주인공은 대중들과의 거리감을 없앤다. 기성세대의 허식을 농락하고 여가시간에는 친구들과 맥주와 주먹다짐을 즐기는 젊은 노동자계급은 자못 쿨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 윌은 엘리트가 아닌 대중들의 현실이며 욕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MIT라는 판타지와 대학시절이라는 애수어린 시절을 배경으로 주인공 일행들에 자신에 이입하고 숀과 램보 교수를 진실한 인도자로 치환한다. 그들의 목적지는 더 나은 삶, 고귀한 계층으로의 상승이다.  


 다만 램보 교수와 숀 교수의 인도 방향에는 차이가 있다. 램보 교수가 윌의 상태를 최대한 빨리 정상화해서 제도권 내에 편입시키려 하는 것에 비해, 숀 교수는 윌과 교감을 통해 사회적 성공 여부를 떠나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기를 바란다. 윌은 숀 교수를 통해 배운 적 없는 관계의 진정성을 배우게 되고, 닫혀있던 그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게 된다. 결국 마음을 치유한 윌은 숀 교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사랑을 좇아 LA로 떠난다.  영화는 진정한 성장이란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정신의 성숙이라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막을 내린다.



숀 교수님의 필살기. 너의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 fault)에 감동을 받아 눈물 콧물 좍좍 뽑아내는 윌. 이는 어릴 적 학대로 인해 마음을 닫은 윌의 방어기제가 무너지고, 그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호전되었음을 알려준다.



This is Diss

 상승에 대한 욕구와 계층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은 채, 비범한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낭만적인 무드로 얼버무렸다는 인상은 들지만, 어디까지나 이 영화가 성장 드라마인 것을 감안해본다면 무난한 결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굿 윌 헌팅>은 어디까지나 불행한 개인의 성숙을 주제로 한 영화이니만큼 사회에 대한 구조적 비판까지 주문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일일 수도 있겠다.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짜임새 잇는 흐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로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주는 의미 또한 별다른 확장을 보여주지 못한 영화였다.  이는 영화의 결함이라기보다 장르적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알아두면 좋은 인물들



윌의 친구 세트(?). 윌의 친구들은 모두 젊은 육체노동자로, 비범한 재능을 가진 윌을 친근감 있는 케릭터로 보이게 하는 효과와 동시에, 심사가 꼬일 대로 꼬인 윌을 받아주는 유일한 안식처이기도 하다.


윌과 연인 스카일라(미니 드라이버). 그녀는 MIT를 재학 중이며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은 소녀가장이다. 그녀는 윌이 학위는 커녕 제대로된 직장도 없으며, 심지어 그녀를 속이고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를 사랑한다. (이런 여자가 어딨어...)



윌 헌팅의 재능을 알아채고 그를 후원하는 제랄드 램보 교수.(스텔란 스카스가드) 무슨 노벨상 버금가는 수학상을 받은 위대한 석학이지만, 영화에서는 윌에게 보석금 대주고, 심리치료비를 대주지만 정작 윌에게 고맙단 소리 한마디도 못 듣고, 수학문제도 제대로 못푸는 멍청이 호갱님 교수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