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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소설 <파이트 클럽>, 척 팔라닉, 랜덤하우스, 1998





남자를 만드는 방법, 농도 구십팔 퍼센트의 증오에 그보다 세 배 많은 애욕을 섞는다.

-남자들은 모두 파이트 클럽에 대해 알고 있다



 이제껏 <파이트 클럽>은 디스토피아적 블록버스터로서 평가되었다. 이 소설에 매료된 사람들은 이 어두운 영웅신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노튼의 삶이 그제까지 얼마나 무료했는지를 설명하며, ‘밑으로 가는 해방’을 주장했던 타일러 더든의 중오가 무엇을 향해 있는지, 그 폭력의 대상인 세계가 얼마나 인간에게 적대적인지에 대해 정당화한다.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 설령 우리가 척 팔라닉의 염세적인 관점에 동의할지라도, <파이트 클럽>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혁명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자의식의 과잉과 극단적인 마초이즘, 세기말의 말세 신드롬 이상은 아니다. 염세주의, 폭력에 의한 해방감, 파괴에 대한 찬양은 사춘기 소년이 헤비메탈을 찬양하는 이유와 유사하다. 파괴만으로 우리는 뜨거워질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혁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 타일러 더든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 형님의 간지터지는 모습



 파이트 클럽 중 말라의 역할에 대해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노튼이 말라를 욕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암환자들 사이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여생을 조용히 보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라를 만난 이후 정신적 히키코모리인 노튼은 비로소 욕망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시점에서 타일러 더든이 탄생한다. 무력감이 말라에 대한 소유욕과 만나면서 모든 것이 파괴적으로 변화한다. 파이트클럽과 메이헴 작전은 그 여정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 혁명의 수혜자는 누구였는가? 추종자이자 파괴 시스템의 일부였던 우주 원숭이들? 아니면 타일러 더든이 아닌 노튼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말라?  


 소설 초반 노튼은 말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순전히 타일러의 것이라고 착각한 채, 타일러를 흠모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노튼이 타일러와 닮아갈수록 그는 타일러의 존재를 위협적으로 느낀다. 그는 세계에 대한 증오와 말라에 대한 욕망이 모든 것을 파멸하는 폭탄이 될 것임을 깨닫는다. 타일러를 막아야만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타일러는 노튼 자신이었다.


 비록 소재가 염세적이긴 하지만, <파이트 클럽>은 구도자의 설화와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구도자가 있고, 만족스럽지 않은 현실과 구원의 계시가 있다. 구도자는 구원을 찾아 떠났다가 모든 것을 깨닫고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이 서사의 목적지는 말라다. 노튼은 말라에게 다가가기 위한 여정 속에 타일러가 되어 파이트클럽과 메이헴 작전을 벌였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장치였다. 구원의 성패는 말라의 승인으로 귀결된다.  


 후기에 이르러 작가는 이 소설이 ‘<위대한 개츠비>의 업데이트 버전’이라고 기술한다. 한편으로 그는 다소 불평조로 ‘아무도 이 소설을 로맨스 소설로 보지 않는다’라고 토로한다. 프로이트적으로 본다면 이 소설은 정신적인 거세를 당한 노튼이 말라를 만나 어떻게 남성성을 회복하는가로 볼 수도 있다. 타일러가 자신과 말라의 손목에 새긴 키스 모양의 화상은 삶에 대한 애증을 상징한다. 마치 가솔린에 오렌지 주스를 섞어 네이팜을 만드는 것처럼, 또는 질산에 황산을 섞어야 니트로글리세린이 되는 것처럼 증오는 애욕 없이는 폭탄이 되지 않는다. 이 양가적 감정이 인간에게 어떤 화학작용을 남기는지 고민한다면, 이것은 가히 로맨스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