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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일베에 대한 단상



 일베를 보면서 마음이 아픈건, 걔네들이 진보진영의 열광이 낳은 괴물이기 때문이다. 군중의 열광은 필연적으로 논리보다는 정서를 동원하고, 때로 결과를 위해 옳지 못하 일임도 감수하는 패권주의로 변한다. 좌든 우든 군중의 열광 내부에는 공감을 강요하는 폭력적 속성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세세한 논리쯤은 배제하거나 부숴버리곤 한다. 


 일전에 영화평론가 허지웅(아 정말 나는 이분의 필력을 존경한다) 씨가 비판한 '깨시민'(깨어있는 시민의 준말로 다소 조롱이 섞인 단어)이 현정부에 대한 뜨겁다 못해 불타오르는 적개심도 그렇고 '나꼼수'로 대변되는 일부 대안미디어들이 제5금융권처럼 유통했던 불분명한 정보들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퍼다날랐던 SNS유저들, 마지막으로 이들을 한데 모아 '정권 심판으로 가버렷~!'이라는 이데올로기화시켰던 민주당의 행태는 수권의 지지층에게도 똑같이 보였던 질환이었다. 뉴라이트, 뉴데일리, 종북논란으로 귀결되는 보수의 구호 역시 오늘날 진보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흡사 <무간도>를 방불케하는 정치 느와르의 원조가 진보인지 보수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일베의 출현에는 진보적 주장을 설파하던 일부 온라인 유저들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일베들은 진보 지지들의 열광을 조롱하며 때로 풍문으로 나도는 잘못된 정보와 논리적 헛점들을 지적하면서 '종북에게 선동 당하지 않는' 자신들를 세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조롱하고 비판했던 진보 지지자들의 나쁜 습성을(무비판적인 진영 옹호, 열광, 결론을 위한 논증)을 가장 저질적이고 추악한 형태로 담습하여 진보와 반대되는 수권적 이데올로기로 편입한다. 즉, 일베는 오늘날 진보 지지자들의 문제점에 대한 최악의 안티테제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안티테제가 나오는 이유에는 세 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 


 첫째로 일베유저가 대체로 어린 연령층으로, 이들은 정치에 대해 순진한 태도를 갖고 있으며, 정의를 외치는 진보적 무리들의 위선에 극렬한 혐오반응을 나타낸다는 점. 


 둘째로 불투명한 미래와 열악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무기력한 진보진영보다는 수권적 가치관을 내재함으로써 스스로 기득권에 편입될 수 있다는 믿음.


 세번째로 인터넷상에서 자신과 같은 보수적 무리가 상대적으로 소수인 것에 착안하여 자기네들끼리 동질감을 느끼기 위해 사용하던 패륜농담에 쾌감을 느끼며, 반관습적인 행태와 음모론적 역사관으로 무장하며 느끼는 은밀한 우월감.


 그러나 나는 허지웅 씨처럼 일베의 발생을 깨시민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분명 일베의 생존 방식과 발상은 허지웅씨가 말한 깨시민에 적을 두고 있을런지 모르지만, 이러한 문제는 좌우를 막론하고 대중적 운동이 갖는 근원적 한계이지, 진보지지세력 일반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는 지상을 걷는 사람에게 어째서 하늘을 날지 못하냐고 다그치는 것과 같다. 역사상 '이성적'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집단적 행동에는 뜨거움과 폭력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다녔다.


 따라서 진보진영의 몰이성적 습성을 고친다고 일베라는 커뮤니티 자체가 사라지지 않으며, 고칠 수도 없다. 그들은 이해관계가 엮인 실질적 수권집단과 달리 완전한 이념적 집단이기 때문에 이념의 대립이 없어지지 않는한 존속할 것으로 보인다. 결론을 말하자면 일부 어린이들의 극우적 망상을 봉쇄할 별 다른 카드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일베를 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이제 그만 현실을 깨닫고 컴백홈하길 바란다. 현실의 진보세력은 정의롭지도, 완벽하지도 않지만 루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그나마 유리한 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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