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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Doragraphycs/이슈번역

저널리즘의 죽음-5부 저널리즘 이전의 저널리즘



지난해 아마존은 CIA와 60억 달러의 계약을 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가 악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조적으로 이것은 납득할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관계가 가능한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사망판정을 내린 이런 “전문적인 저널리즘”의 모델은 이전의 언론 행태의 위기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이전 시대의 언론들은 소위 “벼락출세한 저널리즘”이라고 부를만했다. 이제 그 벼락출세 언론들이 어떤 위기를 발생시켰는지 이야기해보자.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 이야기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내에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인쇄 미디어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거대한 제도 폐지론자의 미디어나, 노예해방신문, 노동신문 등이다. 큰도시마다 적게는 5개, 또는 10개, 20개 정도의 일간지가 있었다. 광고는 신문의 주수입원이 아니었다. 만약 광고가 저널리즘의 주축이었다면 과거에 그렇게 많은 언론들이 있었겠는가? 당시 경제는 이러한 미디어들을 받쳐줄만한 상황이었을까? 나와 다른 학자들이 연구한 기록에 따르면 1880년대, 1890년대 이전의 미국 저널리즘은 인쇄와 우편에 대해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규모의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우편 장려금이 없다고 해도 도시 내 신문배달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다. 이런 제도를 폐지하자는 언론은 없었는데, 이런 보조금이 없이는 언론이 생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민주적이고 보기 드문 지원금 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문을 만들고, 관점의 다양성을 장려하게끔 만들었다. 동시에 19세기 후반 저널리즘은 상당히 당파적 입장이 강했다. 그 시대의 신문이나 일간지 혹은 다른 미디어들은 편집자 사설을 보지 않아더라도 미디어의 관점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만약 18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공화당 신문은 어떤 지면에서도 민주당에 대한 언급을 피했을 것이다. 당시에 이는 비상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반대의 예도 마찬가지였다. 신문 발행인이 편집자이자 정치인이었던 당시 신문 내에서 당파적 시스템은 상거래만큼이나 빈번한 것이었다. 이것에도 문제가 있긴 하나 독자들이 다양한 시점을 갖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 시스템은 좋은 효과를 낸다. 문제는 한 정당이 모든 의사소통을 통제하는 공산주의 국가나 나찌, 기타 권위주의적 국가에서처럼 사람들이 단 하나만의 시각을 갖고 있을 때 발생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다양한 여론을 수용할 수 있다면,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분명 가능할 것이다. 분명 이것은 여론의 부재를 전제하겠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새로운 언론 시스템을 운영하는데 그렇게 나쁜 소식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일반화하다시피 대부분의 언론 시스템은 19세기에 멈추어 있다. 


19세기 말 무렵에는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매우 수익이 나는 사업이었다. 광고 시장은 확산되고 있었고, 새로운 언론은 높은 주목을 받았다. 때문에 필라델피아나 시카고 같은 도시에서는 10개에서 20개 정도의 신문사가 창간되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 뉴욕에서는 30개가 넘는 신문사가 생겼다. 이러한 신문사 숫자는 점차 줄어서 디모인이나 아오와, 루이스빌, 메디슨, 록포드와 같은 작은 도시에서는 서너개의 언론사가 명백을 유지하다가 결국 하나 정도가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시장 독과점 체제인 환경에서 귀에 거슬릴 정도로 당파성을 띈 저널리즘은 나올 수 없었다. 언론은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처럼 펄쩍거릴 뿐이었다. 왜냐하면 언론의 독점하는 인물이 곧 정치적인 영향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 시장은 신진언론의 진입을 방해하기 때문에 신생언론사가 엄청난 위협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이처럼 한계 안에 갇힌 저널리즘의 위기는 우리가 소위 급진적인 시대라고 부르는 20세기 초에 발생했다.


 언론 시장이 상당히 커지면서 대형 언론사의 사주들은 자신의 경영권을 휘둘러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몇 부분에서 예외를 제하면 대개 보수적이었고 반노동적인 정책이었다. 이것이 저널리즘의 스캔들이다. 저널이 물론 정당은 아니다. 그러나 언론사는 기만적인 보도 또는 수익을 남기기 위한 보도로 치우칠만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저널의 이윤추구는 신문사 사주가 가진 정치적 입장에 따라 뉴스의 진실성을 해칠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국 저널리즘의 특성은 신뢰성 면에서 엄청난 위기를 가져왔다. 저널의 이윤추구는 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형성된 양날의 칼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언론사 사주들 일부까지 저널이 너무 타락했기 때문에 신문의 경영권을 공적 기관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심지어 이러한 상황에서 이득을 취하는 신문사의 사주들까지 이를 납득했을 정도였다.


1912년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로 나왔던 세 명이었던 민주당원인 우드로우 윌슨, 불 무스는 테디 루스벨트를 천거하였으며, 사회당은 유진 뎁스를 천거했다. 이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신문사의 철폐를 자신의  공약사항에 넣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하워드는 그렇지 않았다. 



<6부에서 계속>





*이글은 소셜리스트워커.org에 실린 로버트 맥키스니의 <저널리즘의 죽음>을 번역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