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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SF순정만화 레드문, 역시 우리나라는 순정에 강했구나 / 황미나 지음


일러스트는 깔끔하다. 인물은 데스티니 데스티노. 행성 비행편대인 용군 사령관이자 태양의 기사로서의 운명을 지닌 인물. 출세지향적인 기회주의자이며 사다드의 라이벌이지만 이후 주인공 일행을 돕게 된다.


코믹스 강국이 섬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 턱에 우리 나라 만화계의 동향은 상대적으로 어두웠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기야 일본 만화책의 해적판을 판매하면서 한국 만화시장에 종잣돈이 형성된 것은 맞으니 일본만을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일본 만화책이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렸을 적 그토록 만화책을 끼고 살았던 필자에게도 기억에 남는 한국의 만화책 몇 권이 있다.

지금이야 우리나라에서도 나름 괜찮은 만화책을 만들어낸다고 믿지만-실은 요즘 만화를 잘 보질 않으니 확신할 수가 없다- 예전에는 재미있는 한국의 만화책을 찾기가 매우 드물었다. 필자가 일찍이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받으들인 탓에 여자 주인공의 가슴골도 안나오는, 애들이나 볼 것 같은 명랑만화 같이 공익스러운 내용에 밋밋한 전개가 일색이었던 한국만화가 손에 잡히지 않았던 탓이다. 

 레드문 역시 완성도 면에서는 당시 일본만화에 미치지 못하지만 -지금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는 시티 헌터의 원작 '씨티 헌터'도 레드문이 초판 발행할 즈음에는 이미 발행이 10년이 넘은 '고전'에 속해 있었다. 드래곤볼은 당시 연재 중었던 상황- 황미나 씨 특유의 깔끔하고 부드러운 일러스트와 한국이라는 낯익은 배경에서 펼쳐지는 판타지는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어린 필자는 만화책 겉지의 일러스트 색감이 촌스러워 '역시 한국 만화는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유약하지 않으면서 제법 스타일리쉬하단 느낌이 들었다. 어릴적 다소 솔리드하고 원색적인 그림체를 좋아하던 취향이 바뀐 탓도 있겠지만 비슷한 류의 서사 순정만화인 타무라씨의 바사라의 일러스트와 비교해도 나쁘지 않다-솔직히 타무라 씨의 그림체는 좀 지저분해서 가끔은 무엇을 그린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 

  레드문의 진짜 매력은 소년만화인지 순정만화인지 알 수도 없는 촌스러운 초반부를 지나 점차 이야기가 진지해지는 중후반부터 유감없이 발휘한다. 주인공 태영은 필라르였던 기억을 점차 떠올리게 되고, 가족과 마을 주민의 모습으로 변장한 인조인간들이 필라르의 암살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태영은 사랑했던 가족들의 얼굴을 한 암살자들에게 쫓기게다 끝내 비행기 사고로 종적을 감추게 된다. 이후 부활한 태영은 필라르로서의 각성을 모두 마치고 고향이었던 시그너스에 돌아가 동생 아즐라와 시그너스의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운명은 쌍둥이 동생 아즐라를 택하고 끝내 '태양-작품에서는 일종의 구세주라는 의미이다.-'로서 모든 능력과 운명을 동생 아즐라에게 바치는 태영의 희생은 비장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했다. 스펙터클하고 스케일이 웅장한 스토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후반이 갈수록 점차 강해지는 케릭터들의 개성이 작품을 재미있게 해주는 중요한 견인차 노릇을 한다. 특히 후반부에 갈수록 주인공 필라르와 동생 아즐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형제간의 애증과 히로인 루나레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삼각관계, 수호기사 사다드와 필라르와의 애매모호한 관계-실제로 거의 동성애에 가깝다-, 아즐라에 맞서는 반란군, 반란군에게 부모가 살해당한 도적집단의 수장 캐논, 사다드의 어머니를 사랑했던 데스티니와 사다드의 관계, 태영과 지화, 진희의 삼각 관계 등 다양한 인물들의 대립과 갈등을 뚜렷해짐에 따라 작품의 방향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레드문은 90년대 한국 만화답지 않은 복잡하고 미묘한 인물 구성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면 필자가 레드문과 가장 비교할만한 만화책이라고 뽑는 타무라씨의 명작 바사라보다도 인물의 갈등은 더욱 첨예하다고 말할 수 있다. 

타무라 씨의 대작 바사라. 미래의 일본을 무대로 펼쳐지는 서사성과 다양한 인물의 활약은 흡사 사극을 방불케할 정도로도 스케일이 웅장하다.



  물론 순정만화다보니 이야기의 진행이 지나치게 센티멜털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더군다나 후반에 가면 이성애자였던 필라르와 사다드는 거의 동성애자로 바뀌게 되는 성 정체성의 변화를 볼 수 있다-_- 역시 순정만화인가..-서사성이라든지 인물들의 대립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레드문. 순정만화에 SF가 적절이 녹아난 이 작품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충분히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바사라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한번쯤 읽어도 괜찮을 만화. 아, 아직까지 바사라를 안읽은 순정만화 마니아라면 바사라와 레드문 둘다 감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