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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안녕들하십니까에 대한 단상


대자보, 주현우



오늘 아침 타임라인을 수놓은 뉴스에서 단연 화제는 안녕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한 반응들이다. 누군가는 대자보를 찢고 누군가는 안녕하지 못하다는 대자보로 이에 호응했다. 안녕한가 혹은 안녕하지 못한가는 개인의 판단에 맡겨야 할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식으로 대자보를 남기는 일을 대견한 일이라고 칭송할만큼 우리 시대가 표현의 자유에 있어 상당히 위축되었다는 것이다. 서글픈 일이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대자보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기술하기 이전에 분명히 말하고 싶은 바는 이렇다. 나는 철도 노선을 떼어 일부 법인화하는 것이 민영화의 가능성(민영화가 왜 나쁘냐는 반문에는 서울지하철 9호선의 병신성을 예로 들 것이다)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우려, 한편으로 회사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있어 경영진들이 노동 주체를 배제했다는 과정상의 결함, 자칫 생존권과 연결될 수 있는 강압적 조치에 파업으로 맞서는 것이 정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철도 파업을 지지하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모두 정치 및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시민인 바, <안녕하십니까> 대자보는 그 내용과 상관없이 누구나 정치적인 의사표명을 할 수 있다는 징표가 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내가 이러한 안전선을 미리 긋는 이유는 뒤이어 말할 내용이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논지가 <안녕하십니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상되는 오해와 허수아비 치기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다. 하나의 주장에는 옳고 그름이 혼재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제를 두고 긍정적인 국면과 부정적인 국면을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기실 <안녕하십니까>는 주어진 사회 문제에 대한 어떤 대학생의 외침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안녕하시냐'라는 조롱과 역설의 반복적 표현, 그리고 다소 진부하기도 한 자기 반성은 대학생이라는 신분적 발랄함을 만나 청량감을 자아낸다. 이는 표현의 자유가 얼어붙은 시대와의 온도차로 인해 하나의 파격으로 다가왔다. 요컨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자보에 쓰인 수사와 그 타이밍이지, 대자보의 내용 자체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전혀 엄숙하지 않은 관점에서 이것에 동의를 표할 수 있는 것이고, 뒤이어 나온 '안녕하지 못하다'는 화답의 대자보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관망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안녕들하시냐>는 물음은 자기 반성을 넘어 동세대를 문책하는 뉘앙스가 명백히 도사리고 있다. '안녕하시냐'는 물음이 단지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구호를 넘어서, 대중 일반을 향한 책망으로 인식된다면 이것은 더이상 진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안녕하지 못한 사람은 나와 함께 하자'라는 연대를 넘어서 '너희들은 당연히 안녕하지 못해야 한다'는 의미로 확대될 경우 이것은 선악의 문제를 야기하는 또 하나의 배타적 의식이 된다. 내가 '안녕하시냐'는 질문에 다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오늘날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가 안녕하지 못한 상태임을 강요하는 것은 사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생각의 층위를 고려하지 못한 폭력적인 양식이다. 


<안녕하십니까> 대자보의 진의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대자보 원문에서는 자기반성과 군중에 대한 계몽의식이 혼재되어 있다. 문제는 대자보 원작자의 의도가 아니다. 안녕하시냐는 질문은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넘어왔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 물음에 엄숙하게 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안녕하지 못한 상태임을 강박적으로 수용할 필요도 없다. 비록 자신은 안녕할 지라도 이 대자보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정의로운 의식의 고양은 자기 자신에게 되물어야 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관철해야 할 덕목이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엄숙함이 야기하는 피로감을 맛봤다. 때로는 진지한 문제에 진지하지 않게 접근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 또한 알았다. 이번 대자보 이슈가 우리 모두에게 장기적으로 유익하고도 즐거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 '안녕하시냐'는 물음에 그 누구도 정답을 달거나 정답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