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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Doragraphycs/시사

먹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개고기를 먹지 말자는 주장에 대한 반론의 한계


같은 사진. 다른 감상 - "나는 영국의 웰시 코기. 내가 바둑이랑 뭐가 다르죠?" 개고기반대파들은 이걸 반대문구라고 집어넣나본데, 개고기를 먹는 입장에서는 웰시 코기와 바둑이를 달리 보지 않는다. 탕 안에 들어가면 그것은 고기다.




이 글은 개고기 식용금지 주장에 대한 반박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러니까 개고기를 먹지 말자고 하는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주장. 이해가 가시나요?)


개고기 도축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반박글은 아래 링크를 타고 가면 나와있습니다만, 굳이 읽어보시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ㅍㅍㅅㅅ-" 어머 이 귀여운 닭을 어떻게 먹어요?



개고기를 먹지 말자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가지는 한계


 개고기를 먹지 말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키우는 개를 먹지 않겠다는 개인적 신념을 확대하여 모든 개를 먹지 말자고 주장한다. 물론, 이 주장을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는 많은 난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성적인 접근 말고도 무수한 채널이 있다. 이성적인 접근을 포기하면, 오히려 궁핍한 입장에 처하는 것은 이성적인 반박을 하는 사람들이다. 아래의 글을 통해 개고기를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닌,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비이성적이다라는 주장의 오류를 들춰내서, 자신의 주장에 명증성을 높이려는 재귀적 시도의 한계를 말해보겠다.


 개고기를 먹지 말자는 주장에 대한 예상가능한 반론으로는 1.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자 2. 개의 생명권을 주장하고 싶다면, 개와 다른 식용짐승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밝혀라. 라는 것으로 축약될 수 있다. 사실 이런 반박은 근본적이면서, 전통적이며 어찌보면 식상하기까지 한 반론이다. 


 주장 1에 대해 말하자면, 문화적 다양성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문화적 다양성이 존중받되려면 '다르므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형식적 개념에 의존하기 보다는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공동의 이익에 얼마나 부합할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해당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받으려면 그것이 존재야만 하는 당위성과 합리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주류문화의 침략적 동기화에 맞서 소수문화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맥도날드에 대항하는 소머리국밥집의 전략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수문화가 왜 그 지역, 그 사람들에게 걸맞는지, 또한 그곳의 지후와 인습, 가치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에 대해 나름의 객관적인 합리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물질적인 발달이나 다른 문화의 유입 등으로 인하여 그러한 소수문화가 그곳 사람들에게 오히려 괴리감과 갈등을 가져온다면, 그 전통은 변형되거나 해체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한국의 의복사를 되짚어보자. 근대에 이르러 대중들의 옷차림 한복에서 양복으로 변화된 이유는 힘의 논리나 헤게모니의 이동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변화한 삶의 조건 속에서 양복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성의 문제를 거론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개고기를 먹는 문화가 먹지 않는 문화에 대항해 다양성을 호소할 만큼 가치있는 일인가?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는가? 개고기를 먹는 문화는 개고기를 먹지 않은 문화에 대항에 어떠한 객관적인 근거를 내놓을 수 있나? 개고기를 반드시 먹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이성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과 별개로, '개고기를 먹어도 된다'라는 주장 역시 이성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갈등의 끝은 개인의 취향로 귀결된다. '너는 너, 나는 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문화적 다양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다양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단지 다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왜 다를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백지영님 한복 화보..가 아니라 웨딩 사진. 한복은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보편화된 양복에 대고 다양성을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장2에 대해 말해보자.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저 여자가 한 주장의 근원은 개인적인 가치에 있고, 개고기 식습관이 필요한가에 대해 정서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개가 소나 닭보다 사람과 가깝긴 하다. 개는 심지어 도시 한복판에서도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런 차원에서 개는 다른 짐승보다 친근하니까 먹지 말자는 저 여자의 반박에 소는? 닭은? 이라고 묻는 것은 조금 핀트를 벗어난 것이 아닐까?


 이것은 채널의 문제다. 감성의 영역에 대한 이성의 반박은 무의미하여 빈약하기까지 하다. 개와 다른 식용 짐승의 질척 차이가 없다는 이성주의자들은 개를 친근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 오히려 이성주의자들의 변명은 스스로 논쟁의 방향을 옹색한 곳으로 몰아넣는다. 예를 들면 나는 '개보다 닭이 더 귀엽다.' 이런 식의 비아냥들 말이다. 물론 치킨이 개보다 귀여울 수도 있고, 이것은 철저히 주관적 가치에 의존한다. 그들은 '개'를 '닭'으로 치환하면서 개와 닭이 다르지 않음을 환기하려고 하나, 오히려 그들의 주장은 문제의 영역을 주관의 싸움으로 빠트린다. 그리고 이러한 취향의 싸움에서 개를 좋아하는 것과 닭을 좋아하는 것은 대등한 가치이며, 개를 먹자고 하는 사람이나 먹지 말자고 하는 사람의 주장 역시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귀여운 닭을 어떻게 먹냐고? 그럼 넌 이거 먹지 말어.





 아주 쉬운 결론

 감성적인 판단은 감성적인 판단으로만 맞설 수 있다. 이것이 가치관의 문제라면 다름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맞다. 이성이란 그것을 정한 체계 내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주어진 매커니즘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개고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이성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의학적 차원이나 위생, 유통적 차원에서 개고기를 비난을 했다면 이성주의자들에게도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를 친근하게 여기고, 개를 인간의 오랜 친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나는 빨강이 좋아, 파랑이 좋아라, 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이성적인 반박은 무의미할 뿐더러, 상대를 납득시키기도 어렵다. 그래서 결론은 '그건 니 생각이고, 나는 개를 먹을 것이다.' 외에는 별다른 답이 없는 것은 아닐까?




전통이라고 해서 꼭 이럴 필요는 없지만, 어떤 문화권에서는 개고기에 제의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개고기는 전래한 고유의 음식이라는 주장에 대한 미연의 반박


 이것은 주장 1과 궤를 같이 한다. 양습과 구습의 차이는 단지 뉘앙스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내려온 풍습이 오늘날에도 도움을 주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결정된다. 전통은 현대의 조건에 따라 그것이 지켜야할 미풍이 되기도 하고, 없애야할 폐습이 되기도 한다. 육류가 부족하던 시절에 조상들은 양질의 고기를 얻기 위해 개를 잡았지만 오늘날에는 야채가 고기보다 비싼 극악무도한 세상에 살고 있다. 육류가 풍부해진 오늘날 닭이 아니라 개를 반드시 잡아먹어야 하는 객관적인 당위는 없다. 단지 나는 개고기가 좋으니까 먹어야겠다는 개인의 취향만 있을 뿐이다. 


 결론: 개고기를 먹는 것은 개인의 취향.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음. 근데 나는 먹지 않는다.


결론: 개고기 싫다는 사람 앞에서 개고기의 효능을 입증할 생각말고 그냥 모두가 해피한 삼계탕을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