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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표현의 자유, 리버럴리스트와 주체의 미덕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중심 제재였던 가이 포크스 가면.



 트윗을 할 때는 매일 모르는 사람과 정치적인 일로 언쟁을 했다. 트윗은 페북보다 화끈했지만 반대로 짜증스러움과 분노를 유발했기도 했다. SNS가 개인을 미디어화함으로써 정보권력의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 '민주주의'가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무식한 사람들이 다수의 이름으로 유식한 사람을 끌어내리는 하향평준화로 전락할 때 민주주의는 천박해진다. 트윗은 이 민주주의가 만든 카오스를 보여주었다. 예컨데 트윗에서 제대로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찌라시는 더 많았다. 똑똑한 자들은 자기 할 말을 150자로 요약하는 능력을 배워서 트윗을 즐겼지만, 애초부터 트윗은 150자 이상으로 말할 필요와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트위터를 관두고 페이스북을 넘어와보니, 그곳은 거의 평화의 세계였다. 사람들은 관심이 있는 글에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누른다. 반대로 관심이 없는 글은 무시할 뿐이다. 남을 함부로 팔로우해서 딴지거는 사람도 없고, 초장부터 반말에 욕설을 던지면서 불쾌하게 하는 인간들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주로 자기를 드러내고 하는 경우가 많으니, 지인들의 눈도 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공간인 것이다. 


 몇몇이 표현의 자유가 욕설과 포르노를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때나(물론 이는 표현의 자유 일부이긴 하다), 위선에 대한 경멸의 표현으로써 위악적인 언행을 일삼을 때,(자신들은 그것을 '솔직한 것'이라고 착각하는지 모르지만, 위선이나 위악이나 둘 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러한 반상식적 행동에 대한 상식의 보복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준 것은 인터넷의 익명성이었다. 익명성은 자신의 신분과 배경과 관계없이 '한 명의 개인'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다. 그러나 익명성은 가상세계를 부정적 감정의 찌꺼기와 욕설, 포르노그라피가 난무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칫 익명성이 인터넷에 무정부의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음에도, 우리가 그것을 허할 수 있던 이유는 인간에게는 자존의 의지가 있고 양심과 정의가 가는 방향대로 스스로를 가꾸려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익명성을 지지했던 리버럴리스트들은 이것이 인간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킬지언정 스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나 보다.


 타인에게 평가받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는 것은 수동적 윤리이다. 미셀 푸코가 말하길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수동성을 '노예의 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적어도 '주인의 윤리'는 자기 경영, 혹은 자기 지배을 위한 방법적인 고민이었다. 인터넷 에티켓과 익명성이 보장한 무분별한 자유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대인들의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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