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서른을 앞두고

28살 초반에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뭔가 아련하군요.


1.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고 자부하면서도 누구는 대기업 다니면서 월 실수익이 사백 언저리 즈음은 된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도 괜히 그 사람이 다니는 대기업은 모럴 해저드가 심각한데, 공부 잘하고 머리 똑똑해봐야 그런데서 일하는 거보면 생각 없는 놈이라고 흠 잡고 싶어진다. 


2. 그래, 이건 열등감이다. 나에겐 무시무시한 열등감이 있다. 내 월급 몇 달치으로도 어림 없는 보증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그럼에도 비싼 월세는 꼬박꼬박 내야하는 원룸의 리얼리티를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이기 때문에 누려보고 싶은 허영심과 실제로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나를 엄습할 때가 있다. 사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던 일, 살고 싶은 인생이란 부모라는 단단한 지붕 밑에서만 가능했던 그런 달짝지근한 허상이 아닐까.


3. 나와 그리 멀지 않은 지인이 말했다. '역시 사람은 돈이 있어야 돼. 정원이 딸린 집도 있어야 하고, 주말에는 슈퍼카를 몰고 미스 코리아 뺨치는 애인과 데이트도 가야하지. 이제껏 잘 키워준 부모님 여생을 즐기시라고 연말에는 해외 여행도 보내드릴꺼야.' 당시 대학생인 나는 그 친구를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인생을 모르는건 그 친구나 나나 매한가지인 거 같다.


4. 지하철에 구겨진 전단지마냥 앉아서 인생이 속 빈 강정 같다고 느낄 때,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라 좀 당혹스럽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이었던가? 나는 만족하는가? 나는 남이 가진 것이 별 거 아니라고 무시하는 좋지 못한 습관을 갖고 있는데, 사실 정말 나쁜 거는 내가 가진 것을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거다. 그깟 일류대 나왔다고, 연봉이 몇 천쯤 되서 자신만만한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 속물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정작 그들 앞에서 '있는 척'하려고 애쓰는 내 자신을 보고 있으면 좀 의외다 싶을 때가 있다.


5. 뭐? 당당히 살으라고? 자신감을 갖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라고? 그런 말은 너무 착하기만 하잖아. 미안하지만 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구나 마음 속에는 더러움과 순수함, 속물스러움과 고상함, 책임감과 자유로움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만 취한다던가 나머지를 없애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게 현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행복해지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6. 예전보다 확실히 바뀐 게 있다면 이제는 부모님이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장 다니라는 말을 왜 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아마 그들에게도 나와 같은 시절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산다는 건 생각보다 밋밋한 곡선이며, 순수한 시절에는 미쳐 몰랐던 속물 근성이 있었음을 깨달은 때는 어느덧 그들의 나이가 서른에 접어들 무렵이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