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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Doragraphycs/시사

[도라&다이몽] 낸시랭의 다리 사이로 보는 현대 예술


도라 : 드디어 이 기획이 '정상화'를 찾은 거 같다. 이번 주제는 낸시랭과 현대 예술이다. 그 동안 말은 못했지만 이 코너를 개설한 까닭은 재미 대가리도 없고, 담배 냄새나 풀풀 나는 정치 이야기 따위를 하려고 만든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후끈한' 아이템이 필요하다. 솔직히 이놈의 블로그, 너무 퀘퀘한 냄새가 난다.

다이몽 : 현 정치적인 사안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이 코너에서 강정이나 FTA를 다룬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본인의 블로그를 비하할 필요는 없다. 솔직히, 당신 이 코너 급히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채울 기획 아이템도 없었지 않나?

도라 : 아이템, 그까짓거는 하다보면 나오기 마련이다. 점심 시간에 커피 마시다 생각한 아이템이지만 어쨋건 낸시랭은 우리 시대에 한 번쯤 조명해 볼만한 아티스트라고 생각한다.

다이몽 : 당신의 성적 취향에 부합하는 아티스트겠지.

낸시랭. 예술가라기보단 그냥 동대문에서 옷 파는 언니 같다.



도라 :  시끄럽고, 낸시랭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간략한 이력부터 들춰볼까? 낸시랭은 79년생, 미국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혜령. 낸시랭이란 이름은 필리핀에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20살이 되어서는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어머니는 암으로 투병을 시작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여 예술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다이몽 : 그의 괴상한 퍼포먼스에 비해 다소 차분한 배경인데?

도라 : 그럼 뭐, 낸시랭이라고 운석을 타고 지구에 추락했겠나? 그녀가 인간으로서 성장 배경과 예술가로서의 행보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어쨌건, 그녀가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3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섹시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후였다. 그녀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 받지 않은 손님임에도, 비엔날레 한켠에서 란제리를 입고 바이올린을 켰다. 이후 국내 언론은 이 젊은 아티스트의 행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터부요기니 - 명성황후



이후, 그녀의 행동반경은 그야말로 '무한도전'이었다. 몸뚱아리와 괴팍한 퍼포먼스로 '쉽게' 예술가의 타이틀을 따려한다는 의심과 비판과는 달리 정말 그녀는 꾸준한 예술활동을 벌였다. 2005년 '비키니를 입은 현대 예술'에서는 건담에 여성의 육체나 고깃덩어리 같은 오브제를 섞은 터부요기니를 비롯하여, 최후의 만찬에는 자신이 예수를 대신하고 12제자는 각국의 원수를 등장시켜 나르시즘의 세계정복을 꾀하기도 하였다. 예술가라는 경계에서 벗어나 각종 방송과 시상식에 출연을 하고 기업들의 마케팅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란제리는 그녀를 대표하는 오브제인데, 그녀는 직접 란제리를 입고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홈쇼핑에서 직접 란제리를 입고 '영업'을 뛰기도 했다. 2009년 '캘린더 걸'이라는 타이틀로 핀업 걸을 패러디하기도 한다. 그러더니 어린이 프로에 출연하기도 하고, EBS 영어교육방송의 진행을 맡기도 한다. 최근에 가장 큰 화제는 영국에 가서 여왕의 생일 퍼레이드에 난입해 거지 여왕이라는 퍼포먼스로 강제 출국을 당할 뻔도 했다. 한 마디로 낸시랭의 도발적인 예술 행위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다이몽 : 강심장에 출연했을 당시, 솔비가 낸시랭에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도무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도라 : 지엽적인 현상들로만 봤을 때는 낸시랭의 행동들은 전통적인 예술가의 행보와는 전혀 다르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녀가 예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일관된 예술 행위를 보여왔다. 

다이몽: 공중파 토론회에서 자기 이상형에 대한 잡담이나 늘어놓고 생방송 중에 '섹시, 큐티, 키티, 낸시!'를 외치는 것처럼 말인가? 그녀가 정신이상자 같다는 혹평을 듣는 가장 큰 이유는 영국 여왕의 생일 퍼레이드와 같이 중요한 자리에 거지 여왕이라는 퍼포먼스로 영국인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주고도 그것을 예술이라고 무마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네이버에서 '낸시랭'을 치면 '국제망신'이라는 연관 키워드가 같이 뜬다.

영국에서 벌인 낸시랭의 거지 여왕 퍼포먼스. 이것 때문에 낸시랭은 영국에서 강제 출국 당할 뻔했다.



도라 :  글쎄, 인간의 희노애락 중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감정은 없다. 이 감정들은 모두 인간의 삶을 무미건조함에서 벗어나 열정적이게 만들어주는 것들이다. 더군다나 현대 예술에서는 사람들에게 '당혹감'이나 '불쾌감'을 주는 것도 하나의 아름다움이다. 누구나 아름답고 안정적이며, 보다 고상해보이는 것에 예술적 감동을 느끼지만 오히려 그것들은 금새 식상함 속에 묻힌다. 오죽하면 '나쁜 남자 신드롬'이 생겼겠는가? 아름다움이 질서와 착함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더럽고 추잡하며 무언가 어그러진 기이한 물건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낸시랭이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주고 분노을 주었다면, 그것은 낸시랭의 예술작품이 쓰레기란 뜻도 아니고 사람들이 예술의 고상함을 몰라서도 아니다. 그녀는 팝아티스트이며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방식으로 예술을 한다. 만약 사람들이 그녀의 퍼포먼스나 예술 작품에서 불쾌감을 느꼈다면, 그 불쾌감이 그 작품의 미적 효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이몽 : 그러니까, 결국 낸시랭의 수많은 안티팬들은 그녀가 만든 예술 작품의 올바른 관람자가 되는 것인가? 

도라 :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그 안티팬들에게 낸시랭 자체가 '혐오 동물'이겠지만.

[TYN] 다산콜센터 홍보대사였을 당시 낸시랭의 모습. "저는 뇌가 멋있는 남자가 좋아요"



다이몽 :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낸시랭만큼 사랑 받는 팝아티스트가 드물다. 그런데 여기에는 묘한 간극이 있다. 그녀가 '팝 아티스트'라고 하지만 정작 대중적인 사랑보다는 첨단의 유행에 서있는 상업적 예술가들이나 기업, 명품 디자이너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다. '팝 아티스트'라면 일반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대중들은 그녀의 퍼포먼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도라 : 다시 말하겠지만 그녀가 팝아티스트라고 해서 그의 예술이 대중들이 '원하는' 감동을 끌어낸다는 것은 아니다. 앤디 워홀도 팝 아티스트라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 작품이 뭐가 그리 대단한 건지 잘 모르겠다. 아마 난 앤디 워홀의 작품인지 모르고 그의 작품을 본다면 어떤 쾌감이나 분노도 느끼지 못했을 거다. 대중성이 있는 작품이란 뭘까? 대중성 있는 작품이라는 것은 결국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파급력을 주었냐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을 볼 때 느끼는 기괴함, 분노 역시 대중들이 그녀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도 할 수 있다. 첨단에 서 있는 예술가들이나 디자이너들은 바로 그녀가 가져오는 파괴력 미학을 하나의 예술로서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캘린더 걸(2009) - 잠자는 여왕



다이몽 :  글쎄, 그럴듯한 말로 포장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는 여자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그녀는 걸핏하면 자기 몸매를 드러내길 좋아하는 노출광이다. 예술 작품도 그렇지만 그녀의 행동이나 말투, 옷차림도 그저 머리에서 텅 빈 소리가 날 것 같은 천박함과 선정성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게 예술이라면, 일본 야동들은 순수 예술의 정수다.

도라 : 예술은 오랫동안 엄숙과 불행의 공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왜 위대한 예술가들은 불우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그들의 작품은 하나 같이 심오하고 테크니컬하다. 네모난 액자 안에 담겨진 그림들을 보며 우리는 작가가 이 그림에서 인생의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지 논하고 그 그림이 갖고 있는 색과 형태의 절묘함을 칭찬한다. 고전주의 예술에서는 이러한 미학적 관점이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오래전부터 예술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형태에서 파괴로 점점 나아가고 있었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어디인지 선을 긋자는 토론은 이제 촌스러운 것이 되었다. 현대의 아티스트들은 예술이 가진 모든 테두리를 지워버리려고 한다. 외설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낸시랭은 원시적인 감각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대중 예술을 전개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대중 예술은 작가의 고매한 정신을 말하고 색과 형식을 감상하는 고상한 예술이 아니다. 그녀와 대중을 잇는 키워드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키치'다. 키치는 '저속한 작품'이라는 뜻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일어났던 싸구려 모방 작품들을 말한다. 키치는 원래 예술적 감각이 없는 저질의 작품들을 야유하는 의미로 쓰였으나 최근에는 기존 예술의 엄숙주의를 조롱하고 뒤집는 예술 형식으로 하나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키치적이다. 몸매를 과시하며 마음껏 나르시즘을 뽐내는 퍼포먼스 역시 유치하다. 선정적인 노출을 통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저속한 대상으로 만든다. 그리고 선정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반응하는 원시적인 감각이다. 가방끈이 긴 사람이나 아주 못 배운 사람이나 풍만한 가슴골이 드러나고 아슬아슬하게 짧은 스커트가 올라갈 때 순간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는 것은 똑같다. 낸시랭의 작품이 갖는 선정성은 성에 대한 갈망과 같은 원시적인 감각에 통해 대중들에게 빠르고 넓게 전파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예술의 엄숙주의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학 오딧세이의 저자 진중권 씨. 예술에 관한 스테디 셀러 작가인 그 역시 낸시랭의 도발에 '기꺼이' 발끈해주었다. 이것은 일종의 '놀이'가 아닐까?



다이몽 :  그러고보니 최근에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남자가 더치페이한다는 것은 바람핀다는 증거라는 발언을 통해 '된장녀 인증'을 하기도 했다. 이것도 키치적 예술의 일환인가? 거기에 미학자로 이름이 높은 진중권 전 교수가 쓴소리를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도라 :  글쎄, 아마 본인의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한 것 같긴 하지만. 난 페미니즘 신봉자도 아니지만 마초도 아니니 이렇게 말하겠다. 바람피는 건 모르겠지만 그 여자가 마음에 들면 뭐라도 해주고 싶은게 동서고금을 막론한 남자의 마음이다. 하지만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있는 여자들을 보면 속물 같이 보이기는 하다. 아마 진중권 씨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게 아닐까? '만약 낸시랭 당신이 남자에게 밥을 못 얻어먹었다면 그건 남자가 바람을 핀다든가 하는 도덕적 결함에서 원인을 찾지 말고, 당신에게 밥을 사줄만한 매력이 있는지 먼저 되돌아보라.'

그리고 무식한 사회부 기자들은 진중권의 멘트를 무조건 부정적인 것으로 알아 듣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 트윗에 진 전 교수는 "심술이 나서 그런거니 오해말라. '무개념'이 곧 낸시랭에겐 '개념'이다. 너무 발끈하지 마세요. '발끈' 자체가 그녀의 컨셉이겠지만"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을 종합해보면 진중권 씨의 진의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녀에게는 왜 '무개념'이 '개념'일까?

낸시랭이 지금껏 비상식적인 퍼포먼스를 일관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아티스트인 그녀에게 상식이나 개념이라는 것은 일종의 부자유이고, 그녀의 퍼포먼스는 이러한 것들을 파괴하는 행위들이었다. 그런면에서 우리가 볼 때 무개념적인 행동들은 그녀 입장에서는 일종의 개념인 것이다. 그녀는 개념이 부재한 카오스가 아니다. 오히려 안티개념-말하자면 반상식주의-을 시종일관 실행해왔다.  

여기서 대중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개념'에 반하는 짓을 하는 낸시랭에게 당혹감을 느끼거나 분노하게 된다. 낸시랭은 예전에 안티팬들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고마운 팬이라고 얘기한 적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대인배 드립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퍼포먼스가 대중들의 호평이나 지지를 받기 보다는 대중들을 '발끈'하게 할 것인지 안다. 그러나 그러한 충격 역시 현대 예술이 가져다 주는 효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녀는 안티팬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대중을 '발끈'하게 할 예술을 계속할 것이다. 이런면에서 볼때 그녀는 직업적 마조히스트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녀의 18번 포즈. 올드보이에서 유지태의 요가 포즈도 아니고, 이런 개나소나 다 할 줄 아는 포즈를 하나의 심볼로 승화시킨 것은 낸시랭의 파급력을 보여주는 한 예다.



다이몽: 그래, 지루한 얘기 듣느라 내가 고생이 많다. 끝으로 한 가지만 묻자. 당신이 이렇게 열렬히 그녀를 변호하는 까닭이 뭔가? 낸시랭이 섹시해서 그런거 아닌가?

도라 : 인간적으로 봤을 때 나는 낸시랭의 정력적인 예술 활동을 존경한다. 물론 그녀의 가슴과 허벅지에도 가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예술가로서 낸시랭을 보자면 그녀의 키치적인 '섹스 판타지'의 품에 한 번쯤은 안겨보고 싶기는 하다. 많이는 아니고 정말 딱, 한 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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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9년도에 작성한 것으로 필자가 키치에 대한 소양이 부족했음을 인정합니다. 해석에 있어 많은 우를 범하였고 기회가 된다면 키치에 관하여 낸시랭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고자 합니다. 그때까지는 몇가지 관련링크로 아쉬움을 대신해야 할 것 같군요. 아래에 키치에 대한 보다 풍부한 해석을 덧붙입니다. 키치의 개념을 파악하면 낸시랭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판단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진중권의 <코레아니쿠스>를 중심으로 낸시랭을 평가한 블로그

당신은 키치인가, 자기 자신인가?


키치에 대한 지식in의 답변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12&docId=50531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