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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Doragraphycs/시사

[나꼼수]나꼼수가 만들어낸 '꼼수적' 미디어 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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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난 그다지 머리가 좋지는 않아요서민이구요하지만 세상을 뒷받침하고 있는 게 서민이고착취당하고 있는 게 서민이잖아요서민이 알지 못하는 말이나 휘둘러대면서 무슨 혁명을 하고무슨 놈의 사회변혁을 하겠다는 거야나 역시 세상이 좋아지도록 하고 싶어요만일 누군가가 정말 착취당하고 있다면 착취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그렇기 때문에 질문하는 거 아니겠어요그렇지요?

" 상실의 시대 중 미도리와 와타나베의 대화에서 발췌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말투는 언제나 그러했다. “그러니까 얘네들은,” 으로 운을 뗀 그들은, ‘신비로운 작품을 뽑아내는검찰을 비꼬거나, 팟캐스트를 심의하겠다는 방통위의 결정에 대해 팟캐스트가 방송이면 테이프 파는 리어카는 종편이라고 조롱했다. 공중파 토론방송에서라면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정치인들이 넥타이 매듭보다도 단단한 말투로 공방을 벌여야했던 정치적 문제들이 유독 나꼼수에서는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그렇게 표면이 야들야들해진 문제의 속을 풍자라는 메스로 헤집어 사건의 뼈대를 잡아낼 때, 나꼼수의 청자들은 통쾌함을 느낀다.

상실의 시대에서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혁명을 주장하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미도리의 입을 통해 드러내고 싶어 했다. 난해한 이론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에게 미도리로 대변되는 대중은 계몽의 대상이었다. 대중들은 식자들이 만든 말들의 잔치에서 초대된 손님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난해한 파티예법에 피로감을 느껴왔다.

한국에서 소위 자본주의의 모순이라든가 계급의식과 같은 낱말을 대중들이 기피하는 까닭은 비단 반공시대에서 내려온 공포심 때문만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로 양단하는 각종 언론과 오피니언들은 대중들로 하여금 어떤 것이 진실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고 있다. 먹물들이 펼치는 논리의 전쟁은 대중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동떨어져 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각종 비리와 부패를 보면서 우리는 더러운 정치판을 욕하지만 그것은 드라마에서 착한 며느리를 쫓아내려하는 재벌 시어머니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현실감각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와 현실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한들, 우리는 대체로 그 관계를 자세히 알지 못했고 설명하지도 못했다. 대중들의 정치적 무지는 급기야는 정치혐오와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현실과 정치의 거리감을 없애고자 하는 시도가 지금까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기존의 언론과 지식인들의 화법이었다. 언론은 단지 주어진 사실을 열거할 뿐이었다. 지식인들은 논리의 미로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자신들이 피력하고자 바를 증명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방법론은 대중들이 각성하길 바라는근대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팩트의 홍수 속에서 전후좌우를 살펴 하나의 의미로 꿰어 맞추는 것은 여전히 대중의 몫이었다. 정보와 정치에 아마추어인 대중들에게 불편한 일이었다.

이런 피곤함을 덜어준 것이 바로 나꼼수의 역할이다. 명백한 사실과 함께 이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프레임을 던져주는 것, 그리고 그 프레임을 따라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해나가는 나꼼수의 해법은 어려운 정치를 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풀어낸 레퍼토리를 특정 집단의 욕망이나 필요로 귀결한다. 대중들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공공의 이익을 배반하는지 봄으로써, 비로소 정치를 살갗으로 느낀다. 그리고 정치라는 결국 욕구(Need)’의 전쟁이 어떻게 그들의 삶과 관련짓는지, 그리고 알게 모르게 자신이 그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나꼼수가 타 언론이 갖지 못한 폭로의 과단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넘어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꼼수를 가르쳐주고 있다는 뜻이다.

나꼼수는 소비자 중심의 방송이다. 일보 인터뷰에서 김어준 총수는 나는 형식에 맞는 화술을 택한다.”고 말했다. 골방에서 네 남자가 정치 이야기를 한다는 콘셉트로 시작한 이 방송은 결코 젠체하지않는다. 마치 사석에서 수다를 떨듯 패널들은 일상의 언어로 특정 인물이나 조롱하거나 사건을 추측하기도 한다. 때로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적인 것처럼 과장하기도 하고 돌연 자기 자랑이나 상호 비방으로 빠지는 가벼움도 보여주는가 하면, 정치적 비극에 대해서는 강도 높은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여기서 청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위치이다. 사담(私談)이기 때문에 패널들이 욕설이나 비속어의 사용에서 자유로운 만큼 청자는 문제의식이나 지적 수준에서 자유롭다. 이 방송이 패러디와 풍자로 점철된 정치 풍자극이 되거나 신랄한 시사 라디오가 되기도 하는 것은 순전히 소비자의 기호에 달렸다. 진지한 자세를 취할 것 없이 웃길 때는 그저 웃어도 되고 공감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면 된다. 시사 프로그램이 갖는 무거움과 장벽을 보기 좋게 날려버린 케이스다.

사람들이 나꼼수의 화법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야기가 명료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진위를 따지기에 앞서, 그들은 소위 먹물들처럼 딱딱하게 굴지 않는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사건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을 제시한 다음, 구체적인 근거로 이 줄거리에 볼륨감을 더한다. 여기서 거침없는 입담과 농담이 양념처럼 가미된다. 이렇게 완성된 이야기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을 자극한다. 청자들은 나꼼수를 들은 이야기와 느낌을 댓글과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 각종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재생산한다. 그리고 재생산된 콘텐츠는 또 다른 지지자를 만나 또 다른 네트워크로 확산된다. 감성의 공감은 모종의 동질감이 되고 이것이 어떤 흐름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런 면을 볼 때 나꼼수의 화법은 시사 오피니언의 그것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