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가 소위 ‘창조적 자본주의’를 제시한 이래, 그를 부르는 수식어에 ‘자선왕’이라는 낱말이 합류했다. 창조적 자본주의의 요지는 이렇다. 2008년 1월 25일 [머니투데이]에 실린 그의 말을 빌리자면 “창의적 자본주의는 기업과 비정부조직이 함께 일하면서 전세계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시장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이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둥지인 미국에서 새로운 자본주의의 태동을 예고하고 또 스스로 실천에 옳겼다. “게이츠 재단”이 그것이다. 게이츠 재단은 현재 아프리카 기아에 맞서, ‘미국의 리더쉽’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모범적인 자선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다.이제 게이츠는 서구 문명권에서는 사업가로,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등의 제 3의 진영에서 자선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세계의 컴퓨터 운영체제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이 야심만만하고 천재적인 사업가를 노년에는 도덕적인 인물로 칭송할 때, 나는 [The Nation]이란 저널의 9월 9일자 기사에서 아프리카 기아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글쓴이인 Raj Paterl과 Holt-Gimenez, Annie Shattuck은 아프리카 농업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 정확히 말하자면 빌 게이츠의 기아 구제 계획이 마찬가지로 ‘독점적’이며 ‘반민주적’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 ‘반민주적’이란 표현이 곧 게이츠 재단이 아프리카의‘녹색 혁명’을 기치로 농업의 기업, 기계화를 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원칙적으로 그의 재단은 소작농에 의한 농업 사업을 옹호하였으며 이를 지원하였기 때문이다-물론 이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러한 선택은 기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행했던 방식, 즉 광범위한 경작을 위해 영세농민들을 도시로 내몰아 날품팔이꾼으로 전락시키는 전략보다는 보다 민주적이다. 그러나 게이츠 재단의 아프리카 농업 장악은 장기적이지만 탁월하며 또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그들의 자선 분야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게이츠 재단의 기금에 많은 부분은 생명공학에 투입된다. 이 생명공학이란 좋은 품종의 씨앗을 만들고 합성 비료를 대량으로 생산하며, 유전자 변형을 가한 식량을 공급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생명공학의 발전에 핵심으로써, 미국의 거대식량기업 Monsanto 1에 지속적인 투자를 유치했다. [The Nation]지는 이러한 생명공학적 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농업적인 지식, 과학, 기술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IAASTD)에서 4년 동안 연구한 400명 이상의 전문가의 의견에 의하면 게이츠 재단에게 다른 방향으로 아프리카 농업을 지원할 것을 추천”했다고 한다. 게이츠 재단은 그것의 의견을 타당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생물 공학에 투자를 멈추지 않았고 유전자 변형 종자는 종자 공급업체의 독점화에 기여했다. 왜냐하면 개발된 유전자 변명 종자는 엄연한 지적 재산이었으며 아프리카 농민들은 자신의 척박한 땅에 뿌릴 종자를 그들에게 사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전자 변형식품의 부작용이 아직까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밝혀지지 않은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들이 아프리카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요소가 비료 산업이다. 본래적으로 아프리카의 농업은 천연비료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온 거대 자선단체가 아프리카에 활동을 시작하면서 아프리카 소작농업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말라위에서 게이츠 재단은 단시일에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자 화학비료를 대거 투입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화학비료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나 문제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첫째로, 장기적으로 토양의 황폐화를 더욱 앞당길 수 있다는 것, 둘째로 화학비료의 의존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소작농들이 게이츠 재단에 대한 의존도가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화학비료 공장은 아프리카 소작농들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화학비료의 보급화는 천연비료 개발의 도태와 직결되므로 아프리카 소작농들은 자영농에 관한 주권을 침식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프리카를 ‘구제’하려는 게이츠 재단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하나의 독점 사업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창의적 자본주의’라고 게이츠 본인이 일컫는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시장은 단순하게 수요와 공급의 그래프로 그려지는 숫자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큰 것이 작은 것을 먹어 치우고 더욱 성장해 나가는, 적자생존의 야만성을 간직하고 있다. 시장독점을 통해 사회 파급력을 확대하고 자본의 흐름을 통제함으로써 초국가적인 거인이 된 그들의 ‘동정’과 ‘양심’에 호소하여 전인류적 사태를 해결한다는 것은 도둑에게 몽둥이와 밧줄을 주면서 치안을 담당하라는 식의 코메디이자 동시에 호러물이다. 더군다나 자국민의 안보가 절대적으로 위협받는 식량 문제를 다룰 때 결정적 영향력이 그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낱 사설 자선 단체에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누구나 예측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이것은 빌 게이츠가 실제로 진정한 선의로 자선사업을 시작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리고 결과에서 옳게 진행되었는가에 문제이다. 그가 한편으로 자본주의 세계의 독점 사업가로서 '싹쓸이'한 판돈을 가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개평'으로 나누어주는 상황을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해석하든 '자본가의 모순적 위선'이라고 폄하하든 그것은 사소한 문제일 것이다. 빌 게이츠에 대한 찬사 혹은 빈축은 한낱 가쉽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에 대한 게이츠 재단의 파급력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고 그들의 계획이 많은 위험과 부정적인 면을 갖고 있음에도 세계 언론에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도 이 거대 자선단체가 진정으로 인류의 번영과 공존 위해 일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가 제시한-그리고 우리의 식민시대의 기념비적 창간물인 '조선 X보'가 포스트 캐피탈리즘으로 선보인- '창조적 자본주의' 역시 시장과 기업 활동의 밝은 면만을 부풀린 표현에 불과하다. 2010년 8월 8일자 [연합뉴스]의 한 기사에서 독일의 거부들이 빌 게이츠의 자선운동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었다고 전했다. 그들이 지적한 바, 사회 공적 자금 운영은 공공의 이해관계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정부가 나서야 하며 부자들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였다. 2
문제는 빌 게이츠와 게이츠 재단의 거대한 자선금액은 단순히 공공사업 뿐만 아니라 여러 사적 이익에 직, 간접 관여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파급효과 때문에 자선 재단 본래의 취지는 얼마든지 변질되거나 희석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빌 게이츠의 자선 의지가 아무리 순결하다고 해도 시작부터 이 자선 단체는 부패할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안고 있다. 이는 그가 주창한 ‘창조적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로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불구이다.
- 몬산토는 국제농업기업으로 미국에서 출발한 회사이다. 이미 그들의 생명공학 연구는 반인류적이며, 반생명적이라는 이유로 어떤 이에게 '죽음의 기업'이라는 별명까지도 얻을 정도이다. 제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마이클 무어의 영화 중 하나가 이 몬산토의 모럴해저드를 다루고 있으니 찾아보시길 [본문으로]
- 미국의 '발달된' 자선사업의 원인 중 한 가지는 연말에 자선 목적으로 기부금을 낼 경우 회사는 그 만큼의 세금을 공제 받는 법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공공의 성격을 가진 단체들은 기업들에게 충분한 기부금을 요구할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고 기업들은 또 세금에 그 금액을 납부할 바에야 기업 이미지 쇄신을 위해 기부금을 '투자'하는 전략을 택한다. 이는 좋다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미국 기부문화와 법 제도의 단편적인 모습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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