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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왜 사는가?



1.

많은 사람들이 왜 사느냐는 질문에 너무도 쉽게 '행복해지기 위해서' 라고 답한다. 행복이 무엇이냐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어렵지만 우리는 한 가지는 수긍할 수 있는데, 그것은 행복은 마음의 상태라는 것이다. 행복은 100억 모으기처럼 물질적인 조건이 아니며 희노애락과 같이 일시적인 감정 중 하나도 아니다. 행복은 개인이 품은 지고의 즐거움이거나 더없이 편안한 상태다. 행복의 전제가 설령 외부에 있을지언정, 행복 그 자체는 내적인 정신에 가깝다. 바라고자 하는 마음의 이상향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은 언제나 희노애락을 오간다. 때로 성내고, 화를 내고 행복감을 느끼다가도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 환경도 바뀐다. 어린 아이였던 당신은 이제 어른이 되어 독립을 하고 다시 자식을 낳는다. 부자가 되었다가도 거지가 될 수도 있고, 건강한 육체가 일순간 쇠약해질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살아가면 행복을 조금이라도 경험했다면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과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영원히 행복한 상태?  살아가는 한 그러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삶의 목표가 행복해지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원하는 일을 하며, 때로는 일상을 도피하기도 한다. 그것은 삶의 일부분이며 과정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이다. 그렇지만 소설과 달리 우리의 인생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행복했던 순간이 클라이막스를 지나도 삶은 이어진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 될 수 없는 까닭은 행복했던 순간이 끝나도 인생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행복은 인생에 비해 얼마나 짧은가?


2.

따라서 행복은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는가? 사실 우리는 왜 사는가라는 물음 자체가 넌센스이기도 하다. 인과가 뒤집힌 질문이기 때문이다. 가위나 성냥과 달리, 우리는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살아야할 필요를 찾기 이전에 존재해왔다. 실상 모든 존재는 '왜'라는 질문에 침묵한다.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신비로움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우리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어떠한 수억의 확률이 수억번 겹쳐져서 우리는 지금 여기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는한 당신은 당신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단지 눈 앞에 펼쳐진 세계의 신비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말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우리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주지 않았다. 우리는 일렁이는 별빛이다. 소용돌이치는 작은 파도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잠깐 맹렬했던 스파크다. 다시 한번 묻겠다. 당신은 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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